기억나지 않는 오후



흔들리지 않기 위해 걷는다
잔가지만 휘청거리는 바람 속으로

멀리서도 시간을 앞질러 간 오후가 보이지 않는다
벽 속에 촘촘히 접어두었던 기억들이
여우불처럼 까닭 없이 캄캄한 곳에서 튀어오르다
잠깐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진다

머리를 깊숙이 감춘 책갈피같이
이야기들을 늘어놓던 오후가
덜컥 살아온 길이를 지우듯 비를 키우는 사이에도
이름 없는 세월을 너무 빨리
적어놓고 간 하늘이 무거워진다

창문에 베껴놓은 깨알 같은 바람이
끌고 가다 풀어주는 계절이 맵다
아직도 알아차리지 못한 거짓처럼

부를수록 더 멀리 달아나는 풍경과 풍경
오후를 빠져나가는 눈이 부푼다


▶ 기억은 누구를 위해 존재할까. 기억은 어떤 색이 입혀져야 오래 남을까.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결국 기억은 기억하는 사람의 몫일 것이다. 그런데 왜 고맙고 즐겁고 사랑스럽던 기억은 빨리 사라지는 걸까. 그것이 기억하는 사람의 의지일까, 세월의 탓일까. 많은 선지자가 애써 기억하려 했던 것들의 대부분은 그를 통해 삶의 의미를 재해석하기 위한 경험과 체험들이었다. 기억함으로써 과거를 반성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 어려움을 극복하고 더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인간성과 자아를 되찾는 기회도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오늘 나에게 소중했던 사람들을 기억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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