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종호 대전지방보훈청 보상과장

1928년 5월 14일 타이완 타이중시 다이쇼정 도서관 앞, 24세의 청년이 독을 바른 단도를 가슴에 품고 인파 속에서 일왕 히로히토의 장인인 구니노미야 육군 대장이 탄 자동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족‘의 일원이며 군부 실력자인 구니노미야는 일본의 본격적인 중국 출병을 앞두고 타이완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의 전쟁 준비 상황를 점검하기 위해 ’특별 검열사‘ 자격으로 순시 중이었다.

마침내 자동차가 모퉁이를 돌 때, 군중 속에 있던 청년은 단도를 들고 무게차 뒤쪽에 뛰어올라 일격을 가하려고 했지만 경호관에게 가로막히자 던진 단도는 구니노미야의 목을 스쳐 가벼운 상처를 입혔고 구니노미야는 8개월 뒤에 복막염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 24세의 청년이 바로 조명하 의사(1905.4.8.~1928.10.10.)다. 조 의사는 ’황족위해죄와 불경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3개월 뒤인 10월 10일 타이페이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당시, 일본은 이와 관련한 언론 보도를 철저히 통제하고 조 의사가 배후세력 없이 생활을 비관하여 자살하기로 마음먹고 실행한 것으로 결론지었다.

그러나, 조 의사는 순국 직전에 “나는 삼한(三韓)의 원수를 갚았노라. 아무 할 말은 없다. 죽음의 이 순간을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각오하고 있었다. 다만 조국 광복을 못 본채 죽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저 세상에 가서도 독립운동은 계속하리라”라는 말을 남겼고 그 내용을 보면 거사가 개인적인 감정으로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하고 계획하였으며 그 목적이 조국의 광복이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어, 중국과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던 일본이 조 의사의 의거가 끼칠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축소하고 은폐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조 의사는 황해도 송화에서 태어나 21살 때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신천군청 서기가 되었으나 그만둔 후 고향에 부인과 어린 아들을 두고 일본으로 갔다. 이후 상해 임시정부에 합류하기 위해 타이완에서 잠시 생활하던 중 거사를 계획하고 실행했던 것이다.

조 의사의 의거는 어떠한 독립운동조직에도 소속되지 않았기에 권총이나 폭탄 등 아무런 지원 없이 작은 칼을 가지고 한 거사로 당시 구니노미야의 일본 내 위상과 일본이 받은 충격에 비춰볼 때,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큰 의미가 있다. 비록 사건 발생 후 언론 통제, 의거지가 일본이나 중국본토가 아닌 타이완이라는 점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우리는 1909년 10월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의거, 1932년 1월 이봉창 의사가 도쿄에서 일왕 히로히토에게 수류탄을 투척한 의거,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에서 히로히토의 생일행사에 폭탄을 투척한 의거와 함께 조명하 의사의 의거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5월 14일은 조명하 의사 의거일이다. 지금으로부터 95년 전 부인과 어린 아들이 있는 조국을 떠나 이역만리 타이완에서 무모하리만치 작은 칼 하나로 조국의 광복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쳤던 조명하 의사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것은 후손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저작권자 © 대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