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재영 대전지방보훈청 선양팀장


“선생님, 저랑 시계 바꾸시죠.”
흠집 하나 없이 금빛으로 반짝거리는 시계를 내미는 젊은 사내를 보고, 낡은 시계를 가지고 있던 중년 신사는 그 이유를 몰라 머뭇거렸다.
“제 시계는 얼마 전에 6원을 주고 새로 샀습니다. 선생님의 시계는 2원짜리이니 저에게 주십시오. 어차피 제 시계는 한 시간밖에 쓸모가 없습니다.”
시계를 교환한 두 사람은 그렇게 작별을 하게 되었고, 사내는 폭탄을 던지는 의거를 완수한 후 체포되어 총살형을 받고 형장의 이슬이 되고 만다.
그 젊은 사내가 바로 일제 강점기인 1908년 태어나 불과 24살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 윤봉길 의사다.

윤봉길 의사는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량리에서 태어나, 덕산보통학교와 오치서숙에서 공부하였고 19세 때 고향에 야학을 세워 농촌계몽운동을 시작하였다. 20세 때 각곡독서회를 조직하고 『농민독본』을 편찬하였으며, 22세 때 월진회를 조직하여 농촌운동을 정열적으로 전개하였으나 국내에서 독립운동이 어려워지자 23세 때 중국으로 망명하여 1931년 김구 선생의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게 된다.

윤봉길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일본의 상해사변 전승축하회가 열리던 상해의 홍구공원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가와 등 일본의 군 수뇌부를 제거하는데 성공하였다. 그 자리에서 일제에 체포된 윤봉길 의사는 재판을 받는 중에도 단 한번도 거사를 후회하지 않았으며 당당하였다고 한다. 1932년 12월 19일 아침 7시 27분, 일본 본토인 가나자와시에 있는 9사단의 부대 안에서 사형을 당할 때에도 “사형을 각오했고 할 말은 없다”라는 단호하고 명료한 태도로 일관하였다고 하니. 가히 윤봉길 의사의 기백과 민족혼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 아닌가 싶다.

윤봉길 의사의 상해 의거는 침체되어 있던 항일독립운동에 활기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해 적극적으로 지원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백만 대군이 못한 일을 한국의 한 청년이 능히 하니 장하다” 고 격찬했을 정도였다니 윤봉길 의사의 업적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 미루어 짐작이 된다.

다가오는 4월 29일은 윤봉길 의사의 상해 의거 90주년이 되는 날이다.
윤봉길 의사 의거 90주년을 맞아 90년 전 조국 독립을 위해 젊은 생을 바치신 윤봉길 의사의 영전에 머리 숙여 명복을 빌며, 지금의 평화와 번영의 대한민국이 일제의 억압과 강압에도 목숨 바쳐 조국 독립을 위해 희생하신 애국선열들의 피와 땀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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