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철 국립공주대학교 발전위원

잃어버린 왕국 백제. 700년의 장대한 역사와 찬란했던 해상무역의 중심국이자 고대 일본문화의 효시. 그러나 후세 우리의 뇌리에 백제는 잃어버린 왕국이자 역사 속 묻혀버린 국가로 남아있다. 게다가 국가의 이미지조차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져 나라를 잃은 ‘의자왕’이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다.

고령층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코로나 펜데믹 상황에서 가장 중요시 되는 덕목 중 하나가 바로 효(孝)’다. ‘효’사상은 중국에서 유교가 전래되기 이전부터 우리나라 전통사상의 핵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역사적으로 효를 몸소 실천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백제의 마지막 왕인‘해동증자(海東曾子) 의자왕(義慈王)’이다.

의자왕은 어릴 적부터 효성이 극진하고 형제간에 우애도 각별하여 공자(孔子)의 제자 중 가장 효심이 깊은 증자(曾子)와 비견될 만큼 그의 효성은 특별했다. 또한 성품이 용감하고 대담하여 결단력이 강했으며 매우 슬기로웠다. 그리하여 훗날 왕이 되어서도 이름대로 의(義)롭고 자비(慈)로운 정치를 펼쳐갔다. 대외적으로도 당과 왜와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했으며 이웃나라 신라를 거침없이 정벌하는 용맹함도 보여줬다.

“우리처럼 작은 나라가 대국(大國)의 심기를 잘못 건드려 혹시 위험에 처하지는 않을까?”이는 당시 강국이었던 백제를 두고 신라의 임금 진덕여왕이 걱정하며 하던 말이다. 이렇듯 의자왕은 신라가 감히 맞서 싸울 수 없을 정도의 강한 나라를 만들고 있었다.

그렇다면 백제가 갑자기 멸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의자왕 집권 15년차가 지날 무렵 그는 태자궁을 사치스럽게 치장하는 등 치세에 조금씩 흐트러짐을 보인다. 여러 역사의 기록을 살펴보자면 경국지색(傾國之色)의 출현과 여러 가지 흉흉한 사건들을 나열하고 있지만 이를 모두 믿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역사는 모름지기 ‘승자(勝子)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제왕권 후기 지배층의 반발이 존재하였음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이를 틈타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침입한다. 백제가 고구려와 동맹을 맺고 신라를 수시로 압박한 결과였다. 당나라 소정방의 13만 대군은 바다를 건너 인천으로, 신라 김유신의 5만 정예군은 동부전선으로 빠르게 돌파해 왔다. 예상치 못한 연합공격에 평생을 전쟁터에서 지냈던 백전노장 의자왕도 매우 당황해 한다. 계백장군과 5000 결사대를 지금의 논산인 황산벌로 보내 신라군과 맞서게 했지만 중과부적으로 이틀 만에 완패하고 곧바로 사비성은 당군에게 함락된다.

백제는 고대 국가 중 최초로 국사편찬과 불교를 수용했을 만큼 문화가 발달했지만 승자의 유린정책으로 전해 내려오는 문건과 유물은 거의 없다. 이러한 격랑 속에서도 그나마 남아 있는 백제의 유적은 공주의 송산리 고분군과 공산성, 부여의 정림사지 정도를 손꼽는다. 그중 정림사지는 후세 역사학자들에 의해 일본 고대 사찰의 시효라고 밝혀질 정도로 백제는 불교문화가 융성했던 문화대국이다.

다행히도 2011년 2월 공주와 부여, 익산의 백제역사 유적지구가 세계문화유산위원회로부터 세계문화유산의 우선등재 대상으로 선정된데 이어 2015년에는 세계유산으로 정식 지정되었다. 공주의 송산리 고분군과 공산성, 부여의 부소산성과 정림사지, 익산의 미륵사지와 왕궁리 유적 등이 한국의 12번째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이다. 특히 공주의 송산리 고분군중 가장 유명한 무령왕릉은 아시아의 ‘투탕카멘 발굴’이라고 불릴 정도로 그 고고학적 가치가 매우 크다.

무덤의 주인공인 무령왕은 선대에서 도읍을 지금의 서울인 한성에서 공주로 옮긴 후 웅진백제시대의 중흥기를 이룬 인물이다. 타 백제의 고분 외에도 고구려나 신라의 무덤들을 모두 포함해 주인이 알려진 곳은 공주의 무령왕릉이 유일하다. 그만큼 역사적 의미는 물론이고 도적들의 손이 타지 않은 채 출토된 유물의 가치 또한 돈으로 수치화하기 어려울 만큼 천문학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고대 백제왕국의 후손으로서 잃어버린 백제문화의 비밀을 바로 알고 자랑스러운 백제문화를 아끼고 보존해 미래의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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