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여건 딛고 돈암서원 유네스코 등재에 일등공신”

충남 논산의 돈암서원을 비롯한 9개소 ‘한국의 서원’이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충남에서는 유일하게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돈암서원은 1634년 조선 중기 대표적 유학자인 사계 김장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다. 조선시대 교육과 재향, 출판 기능을 한 곳으로 고종 때 서원철폐령도 피해 간 전국 47곳 중 한 곳으로 4백 년 가까이 이어졌다. 김장생과 송시열 등 4분을 기리는 숭례사가 있고, 응도당은 보물 1569호로 문화재적 가치가 높으며, 도서관 장판각에는 수백 년 전 목판이 잘 보존돼 있다.
대전투데이는 돈암서원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데 큰 공헌을 한 김선의 장의를 만나 그동안의 노력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인터뷰를 했다. <편집자 주>

▲돈암서원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습니다.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어려운 여건에도 논산시민들은 물론 충남도민들의 돈암서원에 대한 관심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에 대해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한국의 서원은 조선시대 교육 및 사회적 활동에서 보편화 됐던 성리학을 기초로 형성된 독특한 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에 세계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게 됐고, 그 중에서도 충남에서는 유일하게 돈암서원이 등재된데 대해 자부심을 느낍니다. 세계 문화유산 등재로 도민 자긍심이 높아지는 것은 물론, 국민과 세계인들 사이 돈암서원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이는 관광 활성화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돈암서원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까지 순탄하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2011년 돈암서원을 포함한 한국의 9개 서원이 유네스코에 잠정 등록됐고, 저는 그 다음해인 2012년 처음 돈암서원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그때까지 살아온 세상과는 너무나 다른 세상이라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걱정이었는데, 김용숭 당시 원장님이 지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면서 유네스코 등 대외업무를 제가 맡게 됐습니다. 기존의 세계유산추진위원회가 조직돼 있었고, 이미 서원에 대한 역사자료 등 책자가 만들어지고 있던 때였습니다. 저는 열심히 돈암서원 자료를 공부하며 이곳저곳 회의에 참석하고 지시하는대로 논산시공무원들과 함께 서원정비사업 등을 수행하면서 유네스코 실사에 대비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2015년말 유네스코에서 “한국의 서원이 등재되기에는 문제가 있다”는 소식에 스스로 신청을 철회하고, 재수에 들어갔습니다. 여기에는 한국의 서원들이 유산구역과 완충구역을 너무 좁게 설정해서 개발의 위협이 염려된다는 지적과, 돈암서원의 이전에 대해 서원의 진정성이 의심된다며 보강 서류를 요구했습니다. 저는 서원에 대해 잘 몰랐고 전문위원들이 서류를 작성했기에 그 내용만 열심히 숙지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돈암서원 때문에 유네스코 등재에 걸림돌이 된다 하니 모든게 제탓인양 고민이 시작됐습니다. 회의에 참석해도 눈치만 보이고 자꾸 의기소침해 있을 때 당시 추진단장인 이배용 전 브랜드위원장께서 “모든 서원이 합심해서 난관을 돌파하자”고 하시면서 서원 관계자들과 지자체 공무원들이 심기일전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유네스코 실사를 대비하게 됐습니다.

▲돈암서원은 다른 서원들에 비해 자료 등 고증자료가 부족해 어려움이 있었지요.

돈암서원은 영남의 서원들과는 많은 면에서 차이가 있었습니다. 서원에 관한 고증자료가 턱없이 부족했고, 사진자료 등도 거의 없었습니다. 게다가 영남서원들은 산속에 위치하고 있어서 주변자연과 잘 어울리는 멋진 풍광인 반면, 돈암서원은 개발이 이뤄져 서원을 찾는 전문위원들과 예비실사자로부터 여러 지적을 받았습니다. 우리 돈암서원 때문에 혹 다른 서원들이 유네스코에 등재되는데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가지면서도 어떻게든 누가 되지 않게 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서원 한문자료를 읽고 또 읽고 기도도 하였습니다.

▲자료를 수집하면서 귀중한 자료도 발견했다고 하던데요.

1854년과 1874년에 논산지역에 큰 비가 왔고 정부에서 홍수를 선포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재난구역을 선포하면 세금감면 등 여러 혜택이 주어지잖아요. 당시에도 홍수를 인정해주면 세금을 거둘수 없기에 홍수를 선포하자면 신중에 신중을 기했습니다.그런데도 피해가 워낙 크기 때문에 관에서는 홍수를 선포했고, 서원의 장의들은 서원 주변에 방천사업 등으로 서원을 보호하며 한편으로 서원을 물이 차지 않을 만한 지역으로 옮길 결정을 하게 됩니다. 그 시대는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전국에 47개 서원만이 살아남은 때라 관에 지원 요청을 할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전답을 팔아 우선 사당과 강당 전사청 등 서원의 필수 건출물만 옮기고 사계선생을 기념하기 위한 응도당(1634)과 돈암서원의 건축 과정을 기록한 돈암서원 원정비(1669)는 그 자리에 두고 떠났습니다. 후에 1883년 사계 선생의 9세손은 양성당 후기에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지금 양성당과 응도당을 현판을 바꾸어 이전하는 것은 임시 방편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유력자가 나타나서 원래의 모습대로 꽃도 심고 연못도 만들고 서원의 옛 모습을 되찾았으면 좋겠다.”이로 보건대, 부득이 서원을 옮기고 때가 되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려 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일본 강점기가 시작되고 서원의 옛 자리에 호남선이 지나가면서 모든 것이 헛되게 된 것을 깨닫고 1925년에 돈암서원원정비를 현 위치로 옮기고 ‘사계전서’ ‘신독재전서’ 등을 발간했습니다. 1926년 장판각을 건축하고, 나머지 건축물 등을 속속 건축하는 것을 보면서 ‘천재지변은 나라에서도 다스리기 어려운데 서원의 유학자들은 축대를 쌓고 서원을 옮긴 것이 문제가 되다면 진정 어느 것이 서원의 진정성인가?“ 이제는 진정성을 의심하는 이들에게 정면으로 반문할 자신이 생겨났습니다. 이런 공부로 등재 준비에 더 박차를 가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돈암서원에서는 인성교육도 계속 이뤄지고 있지요.

돈암서원은 2014년부터 문화재청의 ’살아숨쉬는 향교·서원’ 공모 사업에 선정이 됐습니다. 이후 6년째 활용사업을 지속하면서 어린이집 아이부터 성인들에 이르기까지 인성교육을 실시해 오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불시에 인근학교를 방문해 보고 확인한 유네스코 관계자들은 호평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돈암서원에서는 청소년들의 눈높이를 맞추어 홈페이지를 제작하고, 수시로 정보를 업데이트하고 있습니다. ”서원이 옛 것만 고집하고 있으면 현재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어떤 감동을 줄 수 있을까?‘하는 의문을 항상 하며 시대에 맞는 교육을 통하여 선조들이 이루고자 하셨던 정신을 이어받고자 계속 노력하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말씀해 주시죠.

저부터 시행착오가 많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이제 돈암서원을 포함한 한국의 9개서원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당당히 등재되었습니다. 돌아보면 정말 꿈같은 일입니다. 이제 선조들의 뜻을 잘 이해하고 현대에 맞게 서원을 활용해 나가는 일이야말로 서원의 진정성을 회복해가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돈암서원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만큼 우리 고유의 전통사상인 유교 정신을 게승함은 물론 충(忠)·효(孝)를 더욱 널리 알리는데 앞장서 나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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