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대전투데이 대전=송병배기자]충남동부보훈지청은 3․1절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해 독립운동가 알리기 첫번째로 이호원 선생을 지정했다고 25일 밝혔다.

이호원(李浩源) 선생은 1891년 4월 11일 충청남도 공주시 장기면 월송리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교원양성소 과정을 마치고 공립보통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던 중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의하고 1916년 중국 만주로 망명했다.

1919년 봉천성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서 조직된 한족회(韓族會)에 참여해 기관지인 「한족신보(韓族新報)」의 편집을 담당했다.

이어 1920년 5월 현정경(玄正卿)·이시열(李時說)·현익철(玄益哲) 등과 함께 광한단(光韓團)을 조직하고 간의부(幹議部) 위원에 선임되어 관전현(寬甸縣) 향로구(香爐溝)에 근거를 두고 단원들의 군자금 모집을 지도했고, 동단 소속의 김준경(金俊京) 등은 그의 지도 하에 국내에서 28차례에 걸쳐 군자금을 수합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이와 같은 활동으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자 법정에서 "일본은 반적배(反賊輩)를 협박해 조선 국권을 박탈하고 조선의 민복(民福)을 증진한다고 칭하며 병합 초부터 우리 민족의 종교 예술을 억압 소멸하고 농공상(農工商)을 박탈 삭자(削資)하고 3000리 성역(聖域)은 국방․안녕 유지라는 명목으로 현세의 지옥으로 만들었다"고 일제의 침략상을 조목조목 열거하며 질타했다.

결국 1921년 6월 7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제령 7호로 징역 10년을 받고 상고했으나 1921년 7월 9일 고등법원에서 기각․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감형으로 1928년 출옥하자 즉시 가족을 이끌고 봉천성 신빈현(新賓縣) 왕청문(旺淸門)으로 망명 독립운동을 재개했다.

이곳에는 재만 독립운동 단체인 정의부(正義府)에서 설립한 화흥중학교(化興中學校)가 있었는데, 그는 동교의 교원이 되어 항일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1929년 11월 화흥중학교 내에서 현익철, 현정경 등이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창립총회를 개최할 때 이에 참여해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어 노동·농민·자치·군사·교육․재정 등의 정책과 당헌(黨憲) 10조의 제정을 주도하는 등 핵심적 활동을 펼쳤다.

이어 1930년 8월 신빈현 사첨에서 개최된 동당의 제3회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상무집행위원, 선전위원회 교양부 집행위원장 등의 요직을 맡았고 「만주정세」등의 팜플렛과 선전전단을 제작․배부해 지역 교민들을 항일운동의 지원세력으로 견인하는 등 세력 확장에도 힘썼다.

1931년 중앙집행위원장 현익철이 일경에 체포되자 그 후임으로 중앙집행위원장 및 정치부 집행위원장에 선임되어 최고 책임자로 조선혁명당을 이끌었다.

그러나 1932년 1월 동당의 진로 및 항일무장투쟁 방안을 모색하고자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사령 김보안(金輔安), 부사령 장세용(張世勇) 등과 함께 흥경현(興京縣)에서 회의를 개최하던 중 일본군의 급습을 받아 체포되어 1932년 11월 21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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