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용철 벧엘의집 담당목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는 모든 것이 성공하는 것에 맞춰져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 학생들이 새벽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학교, 학원을 오가며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다양한 지식을 습득하여 사회에 이바지하려고 하는 것보다는 소위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좋은 직장을 얻어 잘 먹고 잘사는 성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다. 현대인은 오직 성공만을 목표로 살아가는 성공지상주의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성공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성공의 사전적 의미는 목적한 바를 이루는 것이다.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여 뜻을 이루는 것이라면 거꾸로 모두가 성공한 삶을 살라고 권장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성공의 목표가 남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자신만 잘 먹고 잘살기 위한 이기적인 것이라면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했다. 절대로 혼자서는 살 수 없는 동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자기 혼자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자신의 성공을 위해 나의 또 다른 영혼인 이웃을 억압하거나, 어떻게든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의 절차나 과정은 어떻든지 상관없이 결과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성공지상주의가 문제인 것이다.

성공의 반대말은 실패다. 성공이 목적한 바를 이루는 것이라면 당연히 실패는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성공한 사람이 아니면 실패한 사람이다. 그런데 실패의 원인이 능력의 부족, 노력의 부족, 게으름 등 그래도 납득할 만한 것들이라면 괜찮지만 많은 부분은 다른 외적인 것들이 실패의 원인인 경우도 있다. 때론 절차나 과정을 지키는 것이 실패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정직함이 실패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렇다면 성공과 실패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어찌 되었든 지금 벧엘의집 울안공동체에는 성공보다 실패를 더 많이 경험한 사람들이 한 가족이 되어 살아가고 있다. 어쩌면 성공의 경험은 거의 없을 수도 있다. 실패의 원인이 무엇이든 결론은 실패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울안공동체 식구들의 실패의 원인이 순전히 개인의 책임인지 아니면 외적인 것들인지를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은 실패의 경험이 더 많고 지금도 실패한 삶을 살아가고 있기에 어떻게든 성공을 경험하게 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이 인생 전체를 바꿀 수 없는 작은 것이라도 성공의 경험들을 갖게 하다보면 자연히 그들의 인생도 성공한 것이 더 많은 인생으로 바뀔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다.

작은 목표들을 세우게 하고 그 목표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게 하다 보면 자신의 삶도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작은 성공들이 당장은 자신의 처지를 획기적으로 바꾸어 내지는 못할지라도, 아니 이전의 성공한 때로 돌아가지도 못할지라도 작은 목표라도 세우고 열심히 노력하다 보면 우유통 속의 개구리처럼 지금의 처지를 극복할 수 있는 디딤돌은 되지 않을까? 작은 성공들이 모여 희망이 되고, 그런 희망들이 모여 운명이 되도록 함께 성공 바라기를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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