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까지 대만에 대한 이야기에 앞서 중국사의 흐름을 살펴보았다. 이번 주부터는 본격적으로 대만에 대한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다. 오늘 이야기할 2·28사건은 국민당 정부의 백색테러(white terror, 극우나 우익에 의한 정치적 목적이 개입된 행위)시대의 시초이며 대표적인 사례이다. 대만의 최근세사를 알기 위해서는 2·28사건이 필수이다. 대만을 여행하는 한국인 관광객이 필수로 찾는 여행지인 지우펀에서 촬영한 영화로 유명한 ‘비정성시(非情城市)’는 2·28사건을 배경으로 비극적인 가족사를 그리고 있다. 이 비극적인 스토리의 영화는 1989년 베니스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기도 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한 후 국민당정부의 군대인 국부군(國府軍)이 대만에 와 대만을 중화민국의 영토로 회복하였다. 대만의 주민들은 일본의 식민지 이후의 국민당 정부에 대한 기대가 컸으나 국부군의 대만에 대한 통치는 일본과 별반 다르지 않았고 더 가혹했다. 1945년 일본 패망이후 대륙에서 넘어온 한족들을 외성인(外省人)이라고 부르고, 청나라 때부터 이주해 대만에 자리 잡은 한족을 본성인(本省人)이라고 부르는데 국부군이 대만에 와서 본성인에 대한 차별이 심했으며 대만의 주요 요직은 외성인들이 차지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본성인의 국민당 정부에 대한 신뢰는 점점 낮아가고 본성인들의 불만은 쌓여갔다.
1947년 2월 27일에 전매 상품인 담배를 노점에서 팔던 린쟝마이(林江邁)라는 한 할머니를 단속하는 과정에서 폭행이 발생한다. 단속요원의 과격한 폭행이 방아쇠가 되어 외성인과 차별을 받아오던 본성인들은 폭발하게 된다. 이들은 경찰서로 몰려갔고 이 과정에서 한 학생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시위는 확대된다. 1947년 2월 28일 군중들은 정부시설을 둘러싸고 시위하였고 당시 대만의 행정장관 겸 경비총사령인 천이(陳儀)는 임시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이 과정에서 천이의 집무실로 향한 시위대를 군에서 무차별적인 총격을 하였으며 많은 사상자를 냈다. 이후 대만 전국 각지에서는 시위가 연이어 이어졌다.
당시 천이는 겉으로는 처리위원회를 만들고 사태를 안정시키는 것처럼 보였으나 장제스에게는 군대를 더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장제스는 대만으로 증원군을 보냈다. 증원군은 10일 동안 대대적인 학살을 진행하였고 이때 사망하거나 실종한 사람이 약 3만 명에 이른다. 대만 전역에서 잔혹한 학살이 진행된 후 5월 16일 장제스가 공식적으로 사태 종료를 선언하면서 일단락되게 된다. 국민당 정부는 국공내전에서 수세가 열악해지면서 대만으로 정부를 옮길 생각을 하고 1949년 5월 21일에 대만 전역에 계엄령을 내렸다. 이 계엄령은 1987년까지 지속되었다. 이 계엄령으로 인해 대만에서 2·28사건에 대한 언급은 금기시 되었다.
1987년 대만전역에 발포된 계엄령은 38년동안 지속되다 해제 되었는데 이때부터 2·28사건을 재조명하기 시작하였다. 그 해는 2·28사건의 40주년이기도 했는데 이를 기념해 대만 역사상 최초로 2·28사건을 연구하는 ‘2·28평화일촉진회(二二八和平日促進會)’가 결성되었다. 1988년 본성인 출신 국민당원 리덩후이(李登輝)가 총통에 취임한 후 1995년 최초로 희생자 가족에게 사과하였다. 1996년에는 2·28사건 당시 대만 주민들이 최초로 모였던 공원을 2·28평화기념공원(二二八和平紀念公園)으로 지정하였다. 당시 사상자의 수는 정확하게 집계되고 있지않지만 약 3만명이 희생되었다고 추산되고 있다. 그리고 현재 2월 28일은 공휴일로 지정되어있으며, 2·28사건이 장제스와 연관되어 있다는 주장에 따라 장제스를 기념하는 중정기념당은 2월 28일에는 휴관을 하고 있다. 그리고 대만총통부 앞에는 백색테러 정치수난자 기념비가 있어서 당시 희생당한 분들의 넋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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