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호스피치리더십연구소 대표 이창호

지난해 대한민국을 참담하게 만든‘최순실의 국정농단 게이트’는 너무나도 충격적인 일로, 많은 국민들의 가슴에 상처를 남겼다. 필자 역시 광화문 광장에서 분노를 느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장미 대선 후, 정국의 방향을 가름 할 수 있는 것은 대선후보자들의 당락은 물론 당선이후에도 정치적 안녕과 협치력 발판의 중요한 역할은 유권자들의 표심의 향방에 따라 어떤 결과를 도출할지 높은 관심도 가지고 있다.

우리가 평소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바로 성군(聖君) 세종(世宗)이다. 그렇다면 세종의 애민(愛民)정신을 가진 리더십으로“이것이 오직 국민을 위해 필요하고 쓸모 있는 것이냐?”하는 것이었다. 그만큼 세종의 마음은 오로지 국민을 향해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만 한다. 최근 대선 후보 TV 토론에서 후보자는 세종의 애민정신을 예로 들면서 국민을 주인으로 모시고 머슴으로 봉사하겠다고 자신들의 정책을 열변했다.

세종의 협치 리더십은 지도자는 물론이거니와 국민모두가 본받아야 한다. 군신공치君臣共治의 군주답게 신하들과 눈높이를 맞추며 애민정치 구현에 힘썼던 것이다. 훗날 조광조가“조정의 온 신료가 서로 믿어 한 집안같이 화목했다”며 그의 덕치를 그리워한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또 한편으로 세종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군주였지만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항상 잊지 않았다. 남의 의견을 경청했고, 훌륭한 인재는 출신 성분과 상관없이 등용했다. 세종은 마음을 국민에게 활짝 열어놓음으로써 스스로 독단에 빠지는 것을 경계했다.

세종의 즉위 초년에 왕위에 오른 1418년을 기준으로 황희는 세종보다 34세가 많은 56세였고, 맹사성은 황희보다 세 살이나 더 많은 59세였다. 그나마 젊은 축에 들어가는 윤회마저 39세로 세종보다 열일곱 살이나 더 연상이었다. 그야말로 산전수전을 다 겪었고, 정치적 실세인 상왕 태종의 곁을 떠나지 않으려 하는 노(老)대신들의 마음을, 청년 세종은 어떻게 사로잡았을까?

예컨대 세종이 노(老)회한 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취한 첫 번째 조치는 신하들에게 부지런히 묻고 경청(傾聽)하는 일이었다. 즉위한 지 사흘째 되던 날 벼슬을 내리려던 세종이“내가 인물을 잘 모르니 경들과 의논해서 벼슬을 제수하려 한다.”는 말을 내뱉은 것이 그 대표이다.

또 세종이 즉위한 뒤 가장 먼저 한 말이“의논(議論)하자”였던 것인데, 이후로도 세종은 대신들을 수시로 불러 나라에 도움이 되는 절실한 말을 해달라고 주문하곤 했다. 신하들과 토론하다가도 괜찮은 아이디어가 나오면 곧 해당 부처에 명을 내려 시행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했는데, 이는 신하들에게 왕에 대한 깊은 신뢰를 심어 주었다.

세종은 재위 20년에 인재선발지침을 내렸는데‘몸가짐에 절조(節操)와 염치가 있고, 바른말을 용감하게 하고, 선비로서 우뚝한 행실이 고을 안에 알려지고, 다른 사람이 신뢰할 정도로 재예가 출중한 자’를 뽑으라고 하였다. 도덕성과 능력을 함께 검증하되, 왕에게 직언을 할 수 있는 인재인가 아닌가 하는 것을 무엇보다 중시하였다.

세종은 진심으로 국민을 나라의 기본 바탕인 뿌리로 생각했고, 그들과 더불어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기에 한글까지 창제할 수 있었다. 세종의 애민을 위한 리더십은‘국민과의 협치’통해 가능하다는 것을 세종 스스로 보여줌으로써 지도자들도 성군 세종의 애민정신을 본받아 태평성대(太平聖代)를 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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