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중구는 80년대 대전의 명동으로 불리었으며 충남도청 ,경찰청, 백화점 및 대전시민이 즐겨 찾는 보문산 등 대전의 중심도시 역할을 톡톡히 했지만 최근 신도심의 개발로 인구 유출로 어려움을 격고 있으나 최근 중구의 옛 명성을 되찾기 위해 원도심의 기능을 살려 보.차도 구분 없이 새롭게 조성된 중교로와 우리들 공원, 으능정이거리 및 구 대전·제일극장통을 하나의 권역으로 묶어 젊음의 거리로 변모하고 있다.

특히 중구는 대전의 5개 구 중 가장 깨끗하고 청결한 도시로 인정받고 있으며 비록 원도심으로 도심이 낙후되고 노화된 건물들이 많지만 의외로 골목골목 짜임세 있게 잘 정비 된 모습과 주민들의 의견이 수렴된 다양하게 기획된 도심의 모습에 감탄사가 나올 정도이며 중구는 깨끗한 도시, 쓰레기 없는 도시 ,원도심을 살리면서 원도심과 함께 어울리는 도시정비로 새로움 을추구 하고 있다.

본지에서는 청소하는 구청장으로 유명한 중구 박용갑 청장을 만나 그의 청소철학과 어려운 환경 속에서 역경을 딛고 살아온 그의 감동적인 인생을 재조명 했다

깨끗하고 청결한 중구를 위해 박 용갑 청장은 청소부를 자청 지난 2012년부터 이른 새벽부터 환경관리요원들과 함께 재활용품 수거활동을 시작했으며,2017년 새해에도 태평동 일원에서 장롱, 화장대 ,책상 및 소파, 침대 매트리스 등 대형폐기물을 수거하며 환경관리요원과 함께하며 첫 공식 업무를 현장에서 펼치는 청소행정에 남다른 애정을 보이고 있다.

박 청장은 청소의 조교답게 아무리 큰 장롱이나 책상도 그의 손에 잡히면 산산 조각이 나고 만다.
환경관리요원A씨는 "청장님의 청소실력은 자신들보다 한수 위이며 항상 형님처럼 따듯하게 챙겨주시고 보호대 ,기모장갑등 안전 도구를 제공해주어 보다 안전하게 일 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박청장의 주변에서 구청장이 손수 청소하는 모습이 좋지 않게 비칠 수도 있다며 만류 했지만 박 청장은 앞으로 쓰레기를 치우는 일은 계속 하겠으며 아무리 몸이 아프고 어떠한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지속 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박 청장은 자신이 청소를 하는 것은 "자신과의 약속이기도 하지만 직원들과 함께 쓰레기를 청소함으로서 년4억 원의 예산을 절감 할 수 있으며, 중구의17개동 곳곳의 현장을 누비면서 구민들의 생생한 목소리와 구민들의 불편한 민원을 현장에서 생생하게 주민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일석이조라며 청소 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박 청장이 청소행정은 단 한 달도 거르지 않고 6년째 이어오고 있으며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온 자신을 채찍질 하면서 초심을 잃지 않고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작년처럼 땀이 지체 할 수 없을 정도의 40도를 넘나드는 무더운 날씨에도, 뼈를 깎는 영하의 차디찬 찬바람속이나 폭우 나 폭설이 오는 날이면 작업하기도 몇 배 힘이 들어도 박청장은 6년째 한단차례도 거르지 않고 청소 행정을 이어가고 있는 뚝심을 보이고 있다

박청장이 이처럼 어렵고 힘든 일을 계속 하는데 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박청장의 인생길은 상상 할 수 없을 정도의 고난과 고통의 연속 이었으며 자동차 정비공장,스덴공장 ,구두공장, 택시운전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직업을 전전하며 어려운 삶을 살아온 자신을되돌아 보며 초심을 잃지 않고 어려운 이웃과 주민들에게 봉사하는 마음을 다지기 위함 인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박 청장은 논산에서 조그마한 함석일을 하시던 아버님의 일이 잘못되어 빈털터리기 되어 가족과 함께 10살 때 서울로 상경했다.

막상 서울로 이사는 왔지만 6남3녀의 5째로 태어난 박 청장은 위로 두 형이 군대에 입대하는 관계로 누나와 함께 소년가장이 되어 집안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투정이나 어리광이나 부릴 나이인 10살 때 아이스케이크 장사를 시작했다.

용갑 소년은 학교가 끝나면 곧바로 아이스 케이크 공장으로 달려가 책 보따리를 맞기고 자신보다 무거운 아이스케이크 통과 푸대자루 를 옆에 끼고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물로 배를 채우며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아이스케이크 하나 먹지 못하고 늦은 밤까지 청량리 부근 키스트등 술집 등을 돌며 맥주병 등을 받고 하루에 두 차례씩 아이스케이크를 팔아 치웠다.

용갑 소년은 이이스케이크를 팔고 받은 몇 푼의 돈으로 연탄 한 장 밀가루를 사서 온가족이 하루3끼를 수제비로 배를 채웠으며 이때 질리도록 먹은 수제비 때문에 지금도 수제비는 잘 안 먹는다고 말했다.

용갑소년12살 때 성북동 철길주변 다디미 방에서 살 때 동네 선배가 권투시합에서 이긴 사람에게는 고구마 한 다발을 사준다는 권유에 작디작은 용갑 소년은 16살의 덩치 큰 형과 한판 붙기로 했다 .

용갑 소년이 동네 형을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었지만 동생들과 맛있게 고구마를 먹어야 겠다는 일념 하나로 죽을 각오로 싸웠으며 좀 많이 맡기도 했지만 벌쩍 뛰어 동네 형의 코피를 터트려 승리의 선물로 고구마를 동생들에게 맛있게 먹었다고 당시를 회상하며 웃으며 말했지만 그의 가슴속으로 눈물을 흘리는 듯 제대로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박 청장은 갑자기 아버님이 운명 하시어 중학교도 포기하고 12살 겨울 방학 때부터 한 푼이라도 더 벌기위해 자동차 공장에서 일했으며 청계천 하이힐 뒷축만드는 공장 ,스덴공장 등 이곳저곳 돈이 되는 일이면 닥치는 대로 일했으며 하루는 공장에서 형틀을 뜨는 프레스에 엄지손가락이 끼어 크게 다쳤지만 제대로 치료도 못한 듯 지금도 움직이는데는 지장이 없지만 아직도 약간 불편 해보였다.

박청장은 18살 때 가족과 함께 대전으로 이사와 자동차 정비공장 ,택시미터기공장을 다니면서 야간에는 염동균이 세계챔피언이 된것처럼 복싱으로 성공하여 세계챔피언이 되어 돈을 많이 벌어 집안을 살려보자는 일념으로 열심히 노력 했지만 체육고에서 전문적으로 배운 학생들을 상대하기 너무 벅차 세계챔피언의 꿈을 접고 6년의 권투 생활을 마감했다.

권투를 하면서 지금의 롯데제과에서 야간경비 자리를 두고 면접을 보았지만 체격이 적다고 거절하는 것을 잘할 수 있다고 사정사정하여 간신히 야간경비로 취직하여 하루에 3가지 직장을 다니며 오직 동생4명은 떳떳하게 배움을 길을 걸어야 한다며 자신을 희생 하면서 동생들은 학교를 다니게 했다.

박 청장이 공부를 시작하게 된 동기는 신탄진공단의 어느 공장에 중학교 이상 학력의 모집한다는 소리를 듣고 허위로 이력서에 중학교를 졸업 했다고 기재 했지만 졸업증명서를 가져오라는 말에 원서를 되 돌려받고 비애감에 싸인 박청장은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동생들에게 영어 ,수학 등을 배우며 중학교, 고등학교를 검정고시로 합격했으며 마침내 92학번으로 대학에 입학 96년에 졸업했으며 공부에 욕심이 많은 박 청장은 늦깎이 나이지만 석사 학위까지 챙겼다.

박청장은 87년 지인의 소개로 초등학교 교사인 지금의 부인을 만나 장모님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간단한 결혼식을 올리고 회덕2층 단칸방 40만원 월세 방에서 살림을 시작했다.

이때 연탄가스로 부인과 아들이 축쳐저 죽음의 문턱에 있었지만 사람 살려 달라는 외침에 지나가던 군인의 도움으로 간신히 병원에 도착하여 목숨을 건 질수 있었다고 한다.

박 청장은 79년 80년 택시운전을 할 때 착실하고 성실한 박청장을 눈여겨 보던 중대장의 소개로 민정당 국회의원이던 이재환 전의원사무실에 취직하면서 이재환 의원에 이어 강창희 의원까지 모셨다.
이때부터 박청장은 1981년 10월부터 정당인으로 첫 출발하면서 새로운 인생의 길을 개척 하기 시작 했다.

박 청장은 지난2002년 처음으로 대전시의원으로 당선되어 의정활동을 시작했다.

이어 2006년 심대평 전 총재가 창당한 국민중심당 후보로 중구청장에 도전했지만 당시 박근혜 후보의 칼부림 사건으로 17% 앞서갔지만 결국 중구청장 도전에 낙마 했지만 국민중심당 후보 중에 전국에서 가장 많은 득표률을 보여주는 저력을 과시했다.

박 청장은 구청장 낙방후 식당이나 체육사나 할 생각 이었지만 아내와 아들이 다시 한 번 도전해보라는 권유에 힘입어 다시 중구청장에게 도전하기로 굳은 마음을 다지며 머리를 삭발하고 4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거리를 누볐다.

선거에 패배하고 거리를 누비며 다닐 때 하나뿐인 아들이 군대에 가면서 '아버님의 삭발과 어머님의 눈물'이라는 는 글을 써놓고 돈 때문에 고통 을 겪고 있는 부모님을 위해 군대 재대 할 때가지 1000만원을 모아 아버님을 돕겠다 는 장문의 편지에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아들은 무사히 재대를 하여 군대에서 월급과 용돈 등 을 모은 400만원의 봉투를 어머님께 전달하여 또 한 번 부모님을 감동 시켰으며 박청장도 엄청난 힘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

박 청장은 아들의 응원에 보답으로 2010년 중구청장에 재도전 승리를 장식했으며 2014년 재선에 성공 지금까지 중구의 발전을 위해 솔선수범 하며 100점 구청장이 되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고 노력 하고 있다.

박 청장은 “미래의 희망과 꿈에 대해 지나친 집착은 오늘의 나의 행동을 구속한다 ”며 “미래에 대한 집착은 현재 구청장 자신의 행동이 구속 될 수 있다”며 “현실에 충실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며 지금도 앞으로도 구민들을 위한 알찬 행정을 펼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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