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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문)연해주 독립운동 발자취를 따라서 -4
리량주  |  lyjsim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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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9.09  15:2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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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시엣과 연추, 안중근 의사와 단지동맹을 찾아서.. -
<아산시의회의장 유기준>

분단70년 광복 70년을 맞이하여, 필자는 연해주 지역 한인들의 독립운동을 돌아보며 마음 설레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연해주 여러 곳에서 한인들이 마을을 형성하며 살았던 지역을 더듬었을 때마다 조상들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던가! 생각에 잠긴다.

블라디보스톡을 지나 ·몽구가이 ·포시엣 ·연추 지방을 차례로 탐방하였다. 포시엣은 어떤 곳인가?

우리민족이 큰 마을을 형성하여 살았다. 농사와 고기를 잡으며 살아왔다. 북한 김일성이 중국에서 러시아 땅으로 넘어와서, 러시아군에게 체포되었다. 그리고 러시아군에게 고문을 당하였다. 러시아군은 김일성을 쓸모 있어서, 러시아88여단으로 편입시켰다. 88여단은 러시아군이 일본군과 전쟁하는 항일빨치산 부대이다. 김일성(김성주)은 88여단 대위로 근무하였다.
 

   
 

(그림1, 김일성 체포 장소)

북한에 김일성은 분명히 김성주이다.
   
 

(그림2, 러시아군 88여단 앞줄 오른쪽 두 번째가 북한 주석이었던 김성주 가짜 김일성이다)

김일성장군은 원래 김경천장군이다. 김성주가 김일성의 이름을 도용하여 사용하였다. 김경천장군은 서울태생으로 일본군 기병장교 출신이다.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백마를 타고 경흥군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그림3, 김경천 장군이 진짜 김일성 장군이다)

포시엣은 특히 한국 침례교가 1918년에 4명의 충청남도 출신 선교사를 파송하였으나 이 바닷가에서 폭풍으로 순교하였다. 박노기목사(1882-1918년 충남 신영리 출신), 김희서(1873-1918년 충남 부여 원당교회 출산), 최응선 감로(서천출신), 김영태 총장 4명이 원산을 출발- 함경도 경흥으로 갔다. 그리고 두만강을 건너 도보로 광활한 시베리아 대륙을 20여일 여행한 후 다시 선편으로 연추(크라스키노)로 가기위해 포시엣(posyet)해의 모카우라는 곳에 도착하였다. 이들이 배를 타고 모카우지점을 벗어날 때 갑자기 폭풍으로 배가 파선되어 바다 속에 빠져 하늘나라로 갔다. 이때가 1918년 10월20일 이었다.

포시엣은 러시아인 의사가 자신의 직업인 의사직을 포기하고 한인들의 삶의 도구를 모아서 개인 박물관을 만들고 우리들에게 소개한 것이 특이했다. 포시엣을 벗어나 하 연추에서 활동한 안중근의사의 단지동맹을 탐방하였다.

안중근 의사를 잠시 정리해 본다.

안중근(1879-1910)은 한말의 교육가, 의병장, 의사(義士)이며 1907년 이전에는 교육 운동과 국채보상운동 등 계몽운동을 벌였고, 그 뒤 러시아에서 의병 활동을 하다가 1909년 이토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사살했다. 안중근의 할아버지는 진해 현감을 지낸 안인수 이며 안중근의 아버지는 진사 안태훈이다. 안중근은 태어날 때에 배에 검은 점이 7개가 있어서, 북두칠성의 기운으로 태어났다는 뜻으로, 어릴 때에는 안응칠이라 불렸다.

1884년 갑신정변때 개화당의 일원이던 아버지가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피신했다. 이곳에서 아버지가 세운서당에서 공부했으나, 사서오경까지는 못하고 통감 9권까지만 마쳤다고 한다. 말 타기와 활쏘기를 좋아했고, 자기집안에 드나드는 포수꾼들의 영향으로 사냥하기를 즐거워했고, 명사수로 이름을 날렸다.

1894년 갑오농민이 일어나 해주감사의 요청으로 아버지(안태훈)가 산포군을 조직하여, 농민군을 진압할 때 참가하여, 박석골전투등에서 기습전을 감행하여 진압군의 활동에 큰 도움을 주었다. 1895년 아버지를 따라 천주교에 입교하여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국권회복을 위해, 상하이로 갔으나 상해 유력자들과 천주교 신부들로부터 거절당하고 있을 무렵 아버지가 죽어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다.

1906년 3월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석탄상회를 경영하다가 이를 정리하고 삼흥학교를 설립하여 교육계몽사업을 시작하였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서 전개하던 때에 안중근은 관서지부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일제가 고종의 퇴위와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체결하고, 군대를 해산하자 강원도에 가서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활동을 하다가, 블라디보스톡에가서 계동청년회의 임시사찰이 되었다. 이곳에서 이범윤을 만나서 의병부대 창설을 협의하는 한편, 엄인섭, 김기룡등과 함께 의병부대의 창설의 준비단계 체인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고 최재형을 회장으로 추대하였다. 의병이 300명이 되자, 이범윤을 총독 김두성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참모중장이 되었다.

이때부터 두만강부근 노브키에프스키 또는 크라스키노 한국어 연추지역을 근거로 훈련하면서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했다. 1908년6월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 군사령관으로 함경북도 경흥군 노면에 주둔중인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했다. 그 뒤 본격적인 국내진공작전을 벌이다가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처참하게 패배했다. 왜 패배했느냐? 그 이유는 사로잡은 일본군 포로를 국제법에 의거해서 석방해주었는데, 이들이 안중근의 부대를 알고 기습해서 실패하였다라고 전한다. 그리고 부대는 해체되었다.

안중근과 단지동맹은 무엇일까?
   
 

(그림4 안중근 의사 )

1909년3월2일 노브키예프스키(연추)에서 함께 의병활동을 하던, 안중근, 김기용, 황병길, 강기순, 유치홍, 박봉석, 백낙규, 강두찬, 김백춘, 김천화, 정원식, 백규삼 등 12명은 단지회 일명 단지동맹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그들은 침략의 원흉 이토히로부미를 암살하기로 하고 3년 이내에 성사하지 못하면, 자살로 국민에게 속죄한다고 맹세했다. 1909년9월 블라디보스톡에서 발행하는 원동보(遠東報)와 대동공보(大東共報) 신문을 통해 이토히로부미가 북만주 시찰을 한다는 명목으로 러시아의 대장대신 코코프체프 대신과 회견하기 위하여 하얼빈에 온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하얼빈과 채가구를 거사장소로 설정하고, 채가구(菜家溝)에 우덕순과 조도선을 배치하고 안중근 자신은 하얼빈을 담당했다. 1909년10월26일 이토가 하얼빈 역에서 코코프체프와 열차에서 회담하고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고 군중 속으로 다가가는 순간, 권총을 쏘아 이토에게 3발을 명중시켰다.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川上俊彦), 궁내대신 비서모리 (森泰二郞), 만철(滿鐵), 이사다나카(田中淸太郞)등에게 중경상을 입힌 뒤 대한만세 외치고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그리고 1910년 2월14일 사형선고를 받고 3월26일 뤼순감옥에서 사형을 당했다. 1962년 대한민국정부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그리고 광복회는 2001년 10월18일 러시아 정부의 협조를 얻어 단지동맹의 비를 세우고 그를 기념하여 오고 있다.
   
 

(그림5, 아산시의회 유기준 의장이 단지동맹비가 세워진 비석 앞에서 안중근과 11동지를 위해 꽃을 받치고 기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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