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철 국립공주대학교 발전위원

개인적으로 ‘나 때는 말이야~’라고 시작하는 대화를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대화의 대부분은 이른바 ‘꼰대’스러울 때가 많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나이가 들면 말이 많아진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잔소리라고 생각이 들면 지루하고 괴롭기 마련이다. 그러나 오늘 글의 주제가 주제인 만큼 필자의 초등학교시절 이야기로 시작해야 할 것 같아 독자 분들께 벌써부터 송구스럽다.

7080세대의 나이든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하듯 그 당시 방학숙제는 양(量)도 양이지만 종류가 무척이나 많았다. 미술에 그 닥 소질이 없고 놀기에만 정신이 팔려있던 그 시절, 그 중 가장 힘든 숙제는 다름 아닌 그림 그리기였다. 여름에는 물놀이나 물고기잡기, 겨울에는 눈싸움이나 얼음지치기 정도가 단골 소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한 졸작(拙作)에는 어김없이 많은 친구들이 등장하기 마련이었다.

흰색 도화지에 여러 친구들을 그려 넣으려면 으레 ‘살색’크레용이 필요했는데 이상하게도 늘 모자랐다. 그만큼 자주 쓰이는 색인데다 얼굴과 팔다리를 그리려 힘을 주다보면 질이 좋지 않던 그 당시 크레용은 늘 힘없이 똑똑 부러지기 일쑤였다. 그나마 파스텔이 섞여 잘 부러지지 않는 ‘크레파스’라는 고급제품은 그 이후 한참이 지나서야 시골 문방구에서 구경 할 수 있었다.

살색이란 말 그대로 인간의 피부색을 이르는 말이다. 특히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는 황인종을 부르는 말로 오래전부터 사용해왔다. 그러나 2001년 8월, 이는 인종차별이라는 한 시민의 청원을 국가인권위원회가 받아들이면서 한국기술표준원(KATS)은 기존‘살색’을 ‘연주황’으로 바꿨다. 이 후 2004년 8월, 학생 6명이 ‘연주황’이란 한자를 쉬운 한글로 바꿔달라는 진정서를 제출해, 이듬해 5월 다시 ‘살구색’으로 이름을 바꿨다.

바꾸어 생각해보면 이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어떠한 한 가지 색을 ‘살색’이라 부른다면 그것은 다른 인종이나 다른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차별이 되기 때문이다. 즉 특정한 색을 ‘살색’이라 부르는 순간, 다른 나라 사람들의 피부색은 ‘살색’이 아니라는 것을 뜻하게 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영어로는 복숭아 색과 같다해 피치컬러(Peach Color)라 표기한다. 백인과 흑인이라 하여 화이트나 블랙(White or Black)이라 쓰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할 수 있다.

반면 우리주변에는 아직도 ‘살색’이라는 표현이 무차별적으로 사용되고 있어 안타깝다. 자식들에게는 ‘살구색’으로 가르치지만 정작 부모들은‘살색’이란 표현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살색 스타킹, 살색 란제리, 살색 화장품, 살색 드레스 등 여전히 다방면에서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다. 그러나 다행히도 현재 우리아이들이 사용하고 있는 크레파스나 색연필에는 ‘살구색’으로 일괄표기 되어 있다. 차별적 인식의 확대와 지구촌 시대에 역행하는 표현을 구태여 자손들에게 물려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서로 다른 국적이나 문화의 사람이 만나 이룬 가정을 우린 흔히 다문화가정(多文化家庭)이라 한다. 한국에서는 상이한 문화를 지닌 자국민내의 집단이 없으므로 주로 국제결혼으로 나타나게 된다. 2019년 12월 통계에 따르면 국내 총인구의 4.9%가 다문화 가정을 이루고 있다. 통상 학계에서는 인구전체 대비 다문화가정이 5%를 넘어설 때부터 다문화 사회로 분류한다. 이러한 흐름으로 볼 때 이미 대한민국은 다문화사회로 진입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세계 경제력은 G7국가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뿐더러 코로나로 인한 악재에도 불구하고 경제성장률은 이미 OECD국가 중 선두다. 이제는 다양한 피부색과 함께 모든 문화를 포용할 때도 됐다. 경제뿐만 아니라 대중음악과 영화 등에서도 우리문화는 일찌감치 세계 최고로 인정받고 있다. 빠른 코로나사태 극복은 물론, 포용과 융합의 21세기에는 전 세계 모든 문화를 리드해 나아가는 ‘글로벌 넘버 원’ 대한민국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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