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미 국립대전현충원 현충과

신종 바이러스 코로나19로 인해 전 국민이 갑갑하고 불안함 속에 고통을 받음과 동시에, 다 함께 사회적 거리두기 캠페인을 통해 하나 되어 이 위기를 극복하고자 애쓰는 시국에 더불어 기억해야 할 역사적 사건이 있다. 바로 ‘피의 화요일’ 4․19 혁명이 60주년을 맞이한다.

1948년 초대 국회에서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정부 수립을 선언하면서 제1공화국이 탄생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출범한 이승만 정권은 친일세력을 정치적 기반으로 하였기 때문에 국민으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또한 1954년에는 헌법 상 대통령이 3선을 할 수 없는 제한을 철폐하기 위해, 당시의 집권당인 자유당이 사사오입의 논리를 적용시켜 사사오입 개헌안 통과라는 희대의 사기극을 통해 영구집권을 보장하는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1960년 2월 28일. 부정 선거에 대한 최초의 항거로 대구에서 유세 예정되어 있던 이승만 정권은 청중이 몰리는 것을 막기 위해 일요일임에도 학생들을 등교시켜 영화관람이나 토끼 사냥 등에 동원하였다. 그러자 대구지역 고교생을 중심으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대대적으로 벌어진다. 4․19혁명의 시발점이라 볼 수 있다.

1960년 3월 15일. 4․19 혁명을 촉발한 주원인인 제4대 정․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에서 사상 유례없는 부정선거가 실시되었다. 여럿이 짝을 지어 투표를 하게 하고 투표소 주변에 자유당 완장부대를 동원해 민주당 지지자들을 위협하고, 참관인을 내보내고 투표함을 빼돌리거나, 야당 표를 훼손하여 무효표를 만들고, 자유당 표를 미리 투표함에 넣는 등 말도 안되는 온갖 부정을 장기집권 후계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저질렀다. 특히 이에 분노한 마산 시민과 학생들은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공정한 재선거를 요구하며 마산시청 앞에 모여 가두행진을 진행하였는데 경찰이 이들을 향해 발포를 시작하였고, 이 과정에서 8명이 사망하고 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부상을 입게 되자 정부는 북한 공산당의 사주를 받은 시위라고 발표하고, 사망한 학생들 주머니에 북한 선전물을 끼워 넣는 등의 조작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4월 11일 마산에서 시위를 하던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왼쪽 눈에 최루탄이 관통한 채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 소식을 접한 마산 시민들이 김주열 군의 시신을 확인하기 위해 병원으로 향했다. 그 참혹한 모습에 격분한 시민들은 또 다시 이승만 정권에 맞서 거세게 항의했다. 이에 경찰은 학생과 노인까지 가담한 이 시위를 총칼로 막아서면서 2명이 사망하게 된다.

그리고 4월 18일 고려대학교 4천 여 명의 학생들은 국회 앞으로 가 진정한 민주이념 선언문을 낭독하며 사위를 벌였고 이에 자유당 정권의 이기붕 부통령은 전국 최대 규모의 깡패조직 두목을 이용해 시위 참여 학생들에게 무차별 폭력을 가한 유혈 참사가 발생하자 분노한 학생과 시민들이 자유와 민주와 정의를 외치며 전국에서 일제히 궐기했다.

그 후. 4월 25일 전국 대학교수단 258명이 시국선언문을 발표하며 이승만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였고, 국회가 대통령의 하야와 정․부통령 재선거를 결의하자 마침내 이승만은 하야를 발표하였고, 자유당 정권도 무너졌다. 186명의 사망자와 6,000여명의 부상자가 생기고서야 마침내 끝이난 셈이다. 4.19 혁명은 특정 세력의 계획에 따른 혁명이 아닌 부패한 정권에 맞서 자발적으로 움직인 시민운동인 것이다.

60년 전 그들이 오늘날과 같이 인터넷이나 교통수단의 발달도 없이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민주적인 절차나 과정을 무시하는 정권을 우리가 나서서 바로잡으려한 그들의 간절함과 절실함 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총칼 앞에서도 절실히 자유를 외쳤던 그들의 정신을 본받아 현재 국면한 국가적 위기 사태를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도록 그 정신 또한 배우고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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