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도 열(행정학박사, 국가발전정책연구원장)

경남 합천군(군수 문준희)이 주최하고, 경남대 고운학연구소(소장 김정대)가 주관하고, 고운국제교류사업회(이사장 최효석)가 후원한 “합천 가야산이 품은 고운 최치원의 인문학적 가치” 학술대회가 2019년 5월8일(수) 합천군 종합사회복지관 3층 대강당에서 중국 양주시 최치원 기념관 이빈관장을 비롯한 학계, 합천군민과 경주최씨 중앙종친회 등 각계각층에서4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였다.

문준희 합천군수는 “최치원 선생은 한·중 문화교류의 원류이자 한류문화의 선구자라고 했다.” 김정대 경남대 고운학 연구소장은 “5월의 홍류동 소리길을 걸으며 고운선생의 학술대회를 개최함으로서 영광스럽다고 했다.” 최효석 이사장은 “중국은 10월15일을「최치원의 날」로 지정하여 매년 추모 기념식과 제향행사를 거행하므로서 우리들의 선각자로 자리하고 있다고 했다.” 기조발표를 한 최병주 명예회장은 “인백기천(人白己千) 정신으로 6년을 하루같이 학문탐구에 열중하여 18세에 과거시험에 장원으로 급제했다고 했다.”

제1발제자 최영성 교수는 ”최치원 말년의 역사적 발자취를“ 제2발제자 이빈 관장은 ”문화교류의 교량구축을“ 제3발제자 군산대 김성환 교수는 “최치원과 도교와 가야산 승선설화” 그리고 경남대 노성미 교수는 “가야산 홍류동과 최치원의 관광 스토리텔링(storytelling) 방안“을 발제 했다. 좌장과 사회를 맡은 경남대 정은상 교수는 ”고운 최치원 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재조명하고“ 양주기념관 관리과 왕평 주관이 지정 토론에서 ”한·중간 의 진정한 우정과 새로운 교류의 장을 열자고 했다.“

고운 최치원선생, 네이버 지식백과사전에 의하면 고운 최치원선생은 신라의 학자로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고운(孤雲)·해운(海雲)이다. 12세 때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18세 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879년 황소의 난 당시 이를 비난하는 <토황소격문>을 지으면서 문장가로 유명해졌다. 신라로 귀국한 후에는 문란한 정치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담은 시무 10여 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리면서 아찬(阿飡)이 되었다. 그 후 벼슬에서 물러나 어지러운 현실을 비관하며 유랑(流浪)하다가 가야산 해인사에서 생을 마쳤다고 한다.

한편 문장과 문학에도 아주 능하여 후대 학자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변려문(騈儷文) 형식의 그의 문장은 아름답게 다듬어지고 형식미가 갖추어져 있었으며, 대표적인 저서로는 <계원필경>, <사륙집(四六集)> 등이 있다. 그가 지은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은 화랑도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고운 최치원선생 국제학술대회 참석차 서울에서 버스를 대절해서 합천군내 대회장에 들렀다가 상경길에 가야산 해인사에 들렀다. 평소 언행일치와 학식이 높은 존경스런 전(前) 동국대 최상범 부총장님이 ‘세계 문화유산 천년고찰 해인사 구경보다 가야산 홍류동 폭포 곁의 바위에 새겨진 고운의 제석시(題石詩)를 봐야 한다’고 했다.

고운 최치원선생! 그가 세상을 은둔(隱遁)하여 전국을 다니다가 풍류의 고장 이곳 가야산에서 선신(善神)이 되기 전 바위에 세긴 유명한 시(詩)를 보고 싶어 물어물어 찾아 나섰다. 표지석도 없어 서울에 김서방 찾는 격이었다. 그런데 시조님 영감인지 필자 눈에 딱 들어왔다. 마치 시조님을 뵈온 것 같은 전율을 느꼈다.

狂奔疊石吼重巒(광분첩석후중만) 바위 골짝 치닫는 물 첩첩 산골 뒤흔드니
人語難分咫尺間(인어난분지척간) 말소리는 지척임에도 분간하기 어렵구나.
常恐是非聲到耳(상공시비성도이) 세속의 시비 소리 행여나 들릴세라
故敎流水盡籠山(고교유수진롱산) 흐르는 계곡 물로 산을 둘러치게 하였구나.

제석시(題石詩) 지척에 있는 고운선생둔세지(孤雲先生遁世地) 농산정(聾山亭)을 살펴보니, 시냇물 소리·계곡물 소리·폭포 소리·자연의 소리로 정신이 나갈 정도로 시끌벅적 하였다. 그런데도 고운(孤雲) 선생께서는 농산정에서 세속과 단절하며 귀머거리처럼 살았다고 한다. 참으로 신선의 모습이 그려지고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고운(孤雲) 최치원 선생은 「토황소격문」에서 “천하 모든 사람이 다 너를 죽이려 할 뿐만 아니라, 땅속의 귀신도 이미 벌써 남몰래 너를 베기로 의논했느니라” 라고 하는 인간에게 최고로 무서운 선악(善惡) 징벌(懲罰) 방식으로, 난폭한 상대를 공포에 떨게하고, 정신적인 격퇴로 자신도 모르게 낙상케 하는 등, 칼이 아니라 글로써 천지를 뒤흔드는 아주 격조높은 유명한 문필가였다.

해인사 학사대는 고운선생이 시서(詩書)에 몰입하던 곳이다. 그가 이곳에서 가야금을 연주할 때 수많은 학(鶴)이 날아와 경청했다고 한다. 당시 거꾸로 꽂아 두었다고 전해지는 전나무 지팡이가 지금까지 살아 있으며,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가지가 아래로 처져 자라는 것처럼 보인다. 천년 세월의 풍상을 겪은 고목이 아직도 푸르름과 늠름함을 간직하고 있어, 천년이 지난 지금도 고운 시조공 천년의 힘찬 기(氣)를 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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