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호 대전지방보훈청 보훈과

2019년 3월 1일은 3·1운동 100주년 기념일이다. 1919년 3월 1일 민족 대표 33인이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같은 시간 탑골공원에서는 학생과 시민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에 들어갔다. 이렇게 시작된 시위 운동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졌나갔고, 중국 동북 지방과 하와이 등 국외에서도 들불처럼 일어났다. 이 운동을 우리는 3·1운동이라고 부른다. 삼일절은 1919년 3월 1일 일어난 3·1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날이다.

3·1운동은 실패한 독립운동이다. 일본 총독부의 비인도적인 진압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유지되지 않았고, 더 이상 확산되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 운동으로 조선이 일본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지도 못했고, 오히려 일본 총독부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감시와 탄압을 더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국내 독립운동활동이 위축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또한 3·1운동은 성공한 독립운동이다. 나는 실패했지만 성공한 3·1운동에 대해 이야기 하려고 한다.

3·1운동이 성공한 운동이라고 한 첫 번째 이유는 민족의 각성이다. 우리 민족의 식민통치에 대한 분노와 조선의 독립에 대한 의지를 스스로에게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세계 각지에서 외로이 싸우던 독립운동가들에게도 그들이 혼자가 아님을 느끼게 해줬고, 민족의 뜻과 의지를 보여줬다. 그리고 그 뜻과 의지를 일본 및 세계에 인식하게 하였다.

두 번째 이유는 3·1운동을 계기로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세계 각지에 흩어져 난립하였던 임시정부들이 하나로 모아져 하나의 기관으로 통일되었고, 이후 일어난 독립운동의 중추기관으로 활약하였다.

이처럼 3·1운동은 국·내외의 독립운동가 및 국민들의 용기를 북돋아주었고, 보다 효율적이고 조직화된 독립운동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사실 이 모든 일들은 후대에 와서야 평가를 받고 인정받는 것이다. 저 당시에 태극기를 들고 거리에 나섰던 사람들은 이 운동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후대에 어떤 평가를 받을지, 자신이 앞으로 어떤 고초를 겪을지 몰랐을 것이다. 다만 이 나라가 계속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아선 안 된다는 것, 나와 내 가족의 삶이 고통과 두려움 속에 살게 할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손에 태극기를 들고 거리에 나서게 한 것이다.

다가오는 삼일절은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우리는 100년 전 그 날 분연히 일어나서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우리 조상들의 숭고한 희생에 대해 감사하고 그 정신을 길이길이 기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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