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서천교육지원청 교육장 신경희

모든 것들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판단해야 하는 새 자리에서 새봄이 몹시 바빴습니다. 산수유와 진달래가 오고, 벚꽃이 지나가는 햇빛 좋은 어느 날. 봄바람에 곰살가운 시인의 <시집> 한권이 홀연히 날아들었습니다. 순간 시인의 마음에 울컥하고는 바쁘다는 핑계로 사무실 책상에 그대로 눕혀 놓았습니다.

새 터에서 한동안 글쓰기는커녕 시(詩)한 수 읽질 못했습니다. 지난 주 바쁜 시간을 갈라 숨을 크게 내쉬며 창밖을 한참동안 바라보았습니다. 청사 내 덩그레 서 있는 목련은 우유 빛깔 꽃을 내려놓은 지 오래 이고, 한 잎 한 잎 순한 아기 잎새를 틔우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4월도 중순 능선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밤은 짧아지고 낮은 꽤나 길어졌습니다. 마치 함박눈이 내리 듯 벚꽃이 눈처럼 내리는 길을 거닐 여유를 부리지 못한 채, 이 봄을 보내야 한다 생각하니 괜스레 우울해졌습니다.

한동안 책상에 누워 있던 시집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노란 표지가 봄스럽고 맘에 쏘옥 들어옵니다. 손안에 꽉 차 오릅니다. 수더분한 시인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자세히 보니 여느 시집과는 결이 정말 다릅니다. 내용도 사전처럼 가나다라 순으로 배열돼 있습니다. 동시처럼 쓰인 시어들이 순진하고 기발하기 그지없습니다. 순수한 언어의 마음이 가슴에 착 달라붙습니다.

짧은 내용 몇 편 골라 읽었습니다. 책장 넘기는 소리, 손가락에 느껴지는 종이의 촉감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구슬땀>, “땀 흘려 일할 때/ 몸은 보석 상자가 되지/ 구슬구슬 송알송알/ 구슬이 쏟아지지” <어금니>, “어금니는 엄니다/ 맛 중의 맛, 씹는 맛까지 알려 준다/ 이 중의 이, 가장 일을 많이 한다/ 집안의 엄니처럼 입안의 엄니다/ 일하기 좋아해 쉬 망가진다/ 일복으로 황금을 선물 받는다/ 엄니는 금니가 많다” 입안의 엄니, 어금니, 기발한 발상이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봄밤을 세우며 읽고 싶어지는 그런 시집입니다.

몇 년 전에 저자의 시(詩) <의자>를 만난 후, 단박에 팬이 돼버렸습니다. 그 후로 교육청 업무를 하면서 시인을 만날 기회가 서너 번 주어졌습니다. 수더분하니 곰살가운 살내가 수북하니 풍기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느 잡지사 인터뷰에서 시와 삶의 거리를 18.44미터라고 했더군요. 18.44미터는 투수판에서 홈 플레이트까지의 거리랍니다. 그 거리가 곧 너와 나, 사랑과 이별, 탄생과 죽음의 거리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만난 그의 시는 언제나 삶에 근거해 삶의 현장에서 구수하게 팝콘처럼 꽃을 피워낸 것들이었습니다.

사십대 후반 들어서면서 ‘나는 왜 그런 시(詩)가 안 되는 걸까’ 한동안 자괴감에 빠진 적도 있습니다. 이제는 그 꿈을 살짝 접었지만 사랑이 깊으면 상처도 깊은가 봅니다. 시집을 읽노라니 다시 내 안에 짙은 신열의 꽃 멀미가 일었습니다. 문장 속 동사, 불꽃안의 심지, 혈관안의 맥박, 봄바람이 가슴을 쓸어갔습니다.

생각을 끌고 가면 땅속에서도 길이 생겨 숨통이 생긴다고 했던가요. 온몸에 열리는 숨구멍, 대숲 사이로 옛사랑이, 옛 문장이 스미어 붉은 노을로 번지는 그런 날이 있습니다. 바로 그런 날인가 봅니다. 바람 지나간 뒤에도 신우대를 흔드는 것이 바람이듯, 가슴에 와 닿는 뻐근한 글과 시(詩)들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내 삶을 흔드는 불꽃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짧아져서 더욱 귀해진 봄. 사월의 허공에 꽃잎이 흩날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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