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교육청 장학관 신경희

12월 허리에 서니 숨이 찹니다. 흰 머리카락이 더 많이 섞이고 많이 낡아진 마음으로 그래도 여기까지 무사히 걸어왔습니다. 휴일 오후, 느긋하니 창가에 앉았습니다. 또박또박 품고 온 발자국의 무게를 풀어놓습니다.

지난 오월, 종달새 소리 품은 노란 빛 도는 새순으로 만든 감잎차. 그득한 찻잔으로 실처럼 가늘어진 겨울햇살이 살포시 내려앉았습니다. 따끈한 차 한 잔에 지나 온 날들이 다 꺼내질 것 같습니다

커피처럼 유혹적이고 매력적이지는 않습니다. 풋 비린내 나는 밋밋한 차 맛이지만 내게는 상처를 거르는 거름망이고, 토닥토닥 위안의 향기랍니다. 누가 오기로 한 것도 아니면서 누굴 기다리는 사람처럼 창밖을 자주 바라보며 한 모금씩 마십니다. 마음이 꽃으로 피는 맑은 물소리, 정신이 맑아집니다.

질주하는 나를 멈추고 정지(停止)의 시간을 만나니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베스트셀러가 된 어느 스님의 책 한 권이 단번에 읽힙니다. 차 한 잔을 들고 탁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차의 빛깔과 온기와 향기에서 지나치지 않은 중용의 영혼을 만나게 된다고 하면, 그건 너무 과한 표현일까요.

10여 년 전 부터 주변의 뽕잎을 따서 차를 만들곤 했습니다. 지난해부터는 차종(茶 種)을 감잎차로 바꾸었답니다. 첫해는 뜨거운 물에 데쳐 말리던 기존 방식을 고수했지요. 그러다 올해는 무모하지만 찻잎을 솥에 볶고 손으로 비벼서 덖음 차를 시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훨씬 감칠 맛 나는 차(茶)로 살아났습니다. 정성 주고 손길 닿은 만큼 제 맛을 더해주는 감잎차가 참으로 대견하기까지 합니다. 보탤 것 없는 신선한 맛이 참 좋습니다.

휴일에 온전한 쉼(休)을 하며 차 한 잔을 기울이고 있노라면, 분노니 절망이니 체념, 뭐 그런 것들에 대한 거품이 가라앉고, 깊은 저 내면으로까지 차 빛으로 물들어 간답니다. 한 잔의 차를 마신다는 것, 처음의 비린 맛과 끝의 깊은 맛, 한 생애를 머금고 찻잔 속에 녹아 있는 또 다른 삶과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시간입니다.

평범한 일상이 때로는 눈부신 행복이 된다는 것이 감동이지요. 아무도 몰래 손등으로 훔쳐낸 눈물이 망초꽃 지천으로 피어 흐르는 강물처럼 아름답게 보이는 이 작은 충만함을 뭐라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잠시의 여유로 행복을 잡는 것은 차(茶)의 힘이랍니다. 차(茶)는 그 자체가 자연이니까요.

십일월 낙엽보다 더 많이 지는 시간. <너였는가/나였는가/그리움인가/시간에 이름을 붙이지 말자/목숨에도 나이를 붙이지 말자>고 어느 시인은 말했습니다. 나이 한 살 더할 마음을 굳힙니다. 좀 더 견고해져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나이 값하며 살아 야겠다 다짐도 해봅니다. 무술년 황금 개띠, 새해 1월이 되면 또 다시 첫차를 기다리는 마음처럼 설레고, 어둠을 털어 내려는 조급한 소망으로 벅찬 가슴이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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