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병배 기자

재향군인회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2월 1일 전시(戰時) 임시수도였던 부산에서 허정 당시 국무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국방부 예하단체로 창설됐다. 창설 당시에는 30만명의 회원으로 출발했으나 1962년 5월 11일에는 향군의 이념지표인 ‘향군의 길’을 제정해 그정신에 따라 오늘날 대한민국재향군인회는 13개 시·도회와 221개 시·군·구회, 3,266개 읍·면·동회와 22개 해외지회로 구성된 1,000만명의 회원을 자랑하는 국내 최고․최대의 안보단체로 발전했다.

1950년 1월 20일 육군은 2,000명을 선발해 1차로 만기 제대시켜 예비역으로 편입시켰으며, 1951년 1월 12일에는 제1차 명예제대를 실시하고, 이후 매월 한차례씩 제대 조치함에 따라 창설 직전 약 30만명의 제대군인이 발생했다. 이러한 제대군인을 기반으로 1951년 7월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회담을 반대하는 소신을 밝히고 “시설과 장비만 허용된다면 25만명의 병력을 더 창설할 수 있다.”며 향군창설 의지를 밝혔다. 이에 국방부 병무국이 대한민국재향군인회를 조직하기로 결정하고, 1952년 2월 1일 대한민국재향군인회 창설식을 거행했다. 재향군인회는 1961년 5월 8일 세계재향군인연맹에 가입하면서, 1962년 6월 한 달을 세계재향군인의 달로 설정했다. 다음해인 1963년 6월 8일, 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세계재향군인의 달 기념식에서는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을 비롯해 3부 요인, 3군참모총장을 비롯해 5천여명의 회원들이 참가해 향군의 위상과 단결력을 과시했다. 정부는 1965년 6월, 매년 5월 8일을 재향군인의 날로 제정했으나, ‘가정의 달’, ‘어버이날’, ‘농번기’와 중복되어 2000년 12월에 재향군인의 날 개정을 제기해, 2002년 6월 19일, 10월 8일로 개정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63년 8월 30일 강원도 철원군에서 박정희 국가 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전역식이 거행됐는데, 당시 향군 이성호 회장은 박정희 예비역대장에게 전역증과 향군회원증을 교부했다. 박정희 예비역대장은 향군회원에 가입하면서 『국가와 민족을 위한 일이라면 생명을 바치겠다는 나의 사생관과 국가관은 군복을 입은 오늘이나 또 군복을 벗은 내일에도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라며 향군회원의 일원으로 소임을 다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바 있다. 1968년에 발생한 1. 21사태 직후인 2월 28일에 개최된 제9차 정기 전국총회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은 “이제부터 우리가 할 일과 우리가 사는 길은 적과 정면으로 대결해서 싸워 이기는 길입니다. 우리는 그 길을 택하고 거기에 대결할 태세를 갖추어야 합니다.”라며, 250만 재향군인을 무장시키겠다는 역사적인 발언을 했다. 당시 향토예비군의 조직과 편성은 향군의 조직을 주축으로 이루어 졌으며, 재향군인을 주축으로 한 200만 향토예비군 창설식이 1968년 4월 1일 대전공설운동장에서 거행됐다. 이렇게 창설된 향토예비군은 1·21 김신조 북한 124군부대와 울진삼척에 침투한 북한무장공비토벌작전 등 북한의 도발로 야기된 대침투작전에서 혁혁한 전공을 수립한바 있다.

1969년 닉슨 미국대통령은 “앞으로 베트남전쟁과 같은 군사적 개입은 피할 것이며, 내란이나 침략의 경우 아시아 각국이 협력해 대처해야 한다.”는 요지의 ‘닉슨독트린’을 발표했고, 1971년에는 미국과 중국이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주한미군 2만명을 철수시키는 등 한반도 안보정세가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이에 재향군인회는 자주국방정신에 입각해 1971년 10월 31일 개최된 제4차 이사회의에서 ‘자주국방사상촉진운동’을 채택하고 전국적인 총력안보운동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일련의 ‘향군총력안보활동’은 1977년 1월에 취임한 카터대통령이 주한미군 철수 중지를 결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80년대 말을 기점으로 좌경세력이 확산되기 시작됐고, 1987년부터는 민주화 요구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이 중 민주화 요구는 6·29선언으로 일단락되기는 했지만, 그 와중에 좌경용공세력의 발호를 가져왔고 심각한 안보현안으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향군은 좌경의식 차단과 용공세력 척결을 통해 국가안보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향군역량을 총결집해 전국민을 대상으로 대국민 안보계도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향군은 여성들의 친목도모와 향군의 활동지원 및 군(軍)의 사기 앙양 지원을 위해, 1991년 7월 4일 대한민국재향군인회 여성회를 조직했다. 향군 여성회는 2017년 12월 현재 6만여명의 회원을 확보한 가운데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향군은 1994년 호국용사들의 명예를 고양하기 위해 호국용사 묘지 조성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1997년 9월 부터 현재까지 영천호국용사 묘지, 임실호국용사묘지, 이천호국용사묘지, 산청호국용사묘지를 완공시켰다. 이들 호국용사묘지는 2001년 12월 28일 개정된 “참전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에 의해 2002년 말에 국립묘지로 각각 승격됐다.

국가안보의 제2보루인 향군은 국민들의 안보의식을 고취시키고, 범국민적인 안보역량을 결집시키기 위해 ‘범국민 안보공감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다. 전국의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올바른 안보관을 견지할 수 있도록 전국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안보교육을 실시하고 있으며,
대학생들이 분단의 현실을 피부로 느끼고 확고한 안보의식으로 재무장할 수 있도록 2008년부터 현재까지 6월 25일부터 11일간에 걸쳐 ‘대학생 휴전선 및 6·25전적지 답사 대장정’을 개최하고 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 소득 2만달러와 인구 5천만을 동시에 충족하는 ‘20-50’클럽에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가입한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국가안보를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은 향군의 헌신이 뒷받침됐다. 우리의 조국인 대한민국과 우리가 누리는 최고의 가치인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할 수 있도록 향군의 안보 활동에 함께 동참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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