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교육청 장학관 신경희

12월이야, 누군가 귓가에 가만히 속삭입니다. 12월은 누구에게나 생각이 많아지는 달이지요. 터번만 두르지 않았을 뿐, 인도에서 가져온 오래된 침묵을 사용하게 됩니다. 벌써, 산과 들녘은 숨 고르기에 들어갔습니다. 우리 집 쪽 마당에서 산수유 노란꽃등 올리던 그 날을 건너, 뜨거웠던 여름, 황금 빛 가을을 지나서 어느새 여기까지 왔습니다.

‘오늘 슬픔의 미결수가 되어 또 한 계절을 떠나보낸다’던 싯귀가 어른거립니다. 놓친 기억들에 이끼가 끼어있지만, 대자연의 큰 품에서 올 한해도 건강히 왔음에 감사드리는 시간입니다.

잡초처럼 돋아나는 욕심은 여전한데, 저만치 개평으로 얻은 나이가 제법 수북합니다. 오십 넘어 노안이 찾아오고, 멀리도 가까이도 볼 수 없는 지점에 눈 감으면 선명해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연두 빛 새살 같던 시절, 책이 말을 걸어오는 것을 경험했던 시간, 기다리고 있다가 '나 여기 있어요' 하고 나타나는 것처럼 한눈에 꽂혔던 구절들, 그렇게 시간의 넝쿨이 나이의 담을 넘고 있습니다.

시(詩)에서 나이를 만나면 서러워질 때가 있습니다. ‘저 혼자 영원히 반복하는 뒤척거림을 한다/ 나이 들어 잠 못 드는 밤이 부쩍 많아진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중심에서 점점 멀어진다는 것/ 먼 기억을 중심에 두고/ 둥글둥글 살아간다는 것/ 무심히 젖는 일에 익숙해진다는 것/’ 박성우 시인의 <나이> 전문입니다.

구순을 넘은 김남조 시인의 <시계>는 허탈한 웃음을 짓게 합니다. ‘시계가 나에게 묻는다/ 그대의 소망은 무엇인가/ 내가 대답한다/ 내면에서 꽃피는 자아와 최선을 다하는 분발이라고/ 그러나 잠시 후 나의 대답을 수정한다/ 사랑과 재물과 오래 사는 일이라고/ 시계는 즐겁게 한판 웃었다/ 그럴 테지 그럴 테지/ 그대는 속물 중의 속물이니/ 그쯤이 정답일 테지……/ 시계는 쉬지 않고 저만치 가 있었다’ 시(詩) 일부입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내 소망도 사랑과 재물과 오래 사는 일인데”라고 웅얼거렸습니다.

요즘은 자기 나이에 0.8을 곱해야 인생의 나이가 된다고 합니다. 내 마음의 나이는 아직 청춘(?)이거늘 하루가 또 이렇게 지나갑니다. 참 이상하죠. 나이 들수록 해가 짧아지니 말입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사물을 보는 방식도, 느끼는 방식도 점점 변화합니다. 지금의 감정은 오직 이 순간에만 느낄 수 있는 감정입니다. 지금 이 순간은 생애 단 한 번의 시간이며, 지금 이 만남은 생애 단 한 번의 인연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 순간의 감동, 순간의 경탄을 최고의 것으로 생각하고 마음껏 음미하며 남은 시간을 보내야겠습니다. 그래야만 후회가 덜어질 테니까요.

멀리 습관성 구름이 떠가고 있습니다. 이쯤 해서 숨을 고르고, 잠시 멈춰서 옆과 뒤를 살펴보며 소중한 사람들과 무심하지 않는 시간을 가져야겠습니다. 지금 마시는 차 한 잔, 사랑하는 누군가와 보내는 시간, 즐거운 사람들과의 만남, 뭐든지 일기일회(一期一會)인 것입니다.

한 해가 또 이렇게 가고 있습니다. 한 해가 가면 새 해가 온다는 말이고, 새 해가 옴은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이 있다면, 다시 꺼내 들여다보고 손질해가며 실현가능한 청사진을 더 찬찬히 그려봐야겠지요. 지금부터 남은 2017년을 잘 갈무리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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