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교육청 장학관 신경희

서리 내리고 국화주와 국화전을 먹는다는 가을의 마지막 절기인 상강(霜降)이 지났습니다. 구절초, 노랑 산국 향기 속으로 가을이 깊어갑니다. 하늘은 푸르고 높고, 소슬바람 따라 마음도 덩달아 출렁입니다.

단풍이 짙어지면서 그리움은 그 두께를 더해갑니다. ‘눈멀면 아름답지 않은 것 없고, 귀 먹으면 황홀치 않은 소리 있으랴. 마음 버리면 모든 것이 가득하니 눈물겨운 마음자리도 스스로 빛이 나네.’ 어느 해 가을인가, 의미 깊게 젖어들었던 싯구(詩句)가 떠오릅니다.

남부러울 것 없이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도 남모르는 허전한 가슴을 끌어안고 삽니다. 사람은 불완전한 존재이고, 삶은 아이러니의 연속이기 때문이지요.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것’이라던 어느 유행가 가사에 백번 공감하면서도 노숙(?)한 중년의 삶이 서늘해지기도 합니다.

오라하지 않아도 오고, 가라하지 않아도 가는 시간에 등 떠밀려 가는 삶. 인생이란 무엇인가.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 수는 없을까. 뭐, 이런 저런 생각들을 부쩍 하게 됩니다. 가을이면. 석양이 처연하게도 아름답던 어느 날, 어떻게 하면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사색에 빠져들었습니다.

독일의 실존철학자 니체는 “지나간 일을 후회하는 것보다 더 바보 같은 일은 없다. 사실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거기서 교훈을 얻어 계속 의연하게 살아가야 한다.” 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처럼 과거를 훌훌 털어내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이런 우리의 모습을 니체는 인간 정신의 세 가지 발달단계로 설명을 합니다.

첫 단계는, 무거운 짐을 지우고 뜨거운 사막을 걷게 해도 묵묵히 순종하는 낙타의 단계입니다. 짓눌린 상태가 계속되는 낙타의 마음속은 막연한 분노와 원한, 증오, 질투 따위의 감정이 반복되어 마음속에 쌓이는 르상티망(Ressestiment) 상태가 되어갑니다. 두 번째는, 낙타 단계에 머물렀던 사람이 비로소 NO라고 외칠 수 있는 사자의 단계입니다. 사자는 자유와 권리가 침해당하면 주인일지라도 달려들 만큼 용맹하지만, 늘 혼자인 까닭에 불안하고 고독합니다. 이 또한 성숙한 모습은 아니라고 합니다.

니체가 인간 성장의 최고점으로 본 세 번째 단계에는 의외의 존재가 등장합니다. 바로 어린아이입니다. 니체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린아이는 순진무구함이며 망각이고, 새로운 출발, 놀이,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 최초의 운동이자 성스러운 긍정이다. 형제들이여 창조라는 놀이를 위해서는 성스러운 긍정이 필요하다.” 어린아이는 잘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언제나 자신이 하는 일을 즐깁니다. 조금 전에 싸운 친구와도 금방 화해하고 같이 놉니다. 직선적이고 단순한 까닭에 감정을 쌓아둘 줄 모르고, 후회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린아이처럼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니체는 망치를 들어 스스로를 파괴하라고 조언합니다. 온전히 나 자신만의 가치를 남기고, 나를 둘러싼 세상의 잉여 가치를 부숴버리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아무로 파티(Amor Fati), 운명을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운명은 모든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다가오지만 이에 묵묵히 따르는 것만으로는 창조적이지 않다. 오히려 운명의 필연성을 긍정하고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 진심을 다해 사랑할 때, 비로소 인간 본래의 창조성이 발휘된다.”라고 그는 덧붙이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후회하지 않는 삶은 후회할 일이 없는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후회가 된다면 솔직히 인정하면 됩니다. 나에게 닥치는 운명의 장난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운명도, 지나간 과거도 돌이킬 수는 없지만, 더 이상 후회하지 않는 삶은 선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수투성이 삶이라 해도 후회하지 않겠다, 후회가 된다면 인정하고, 현실의 삶에 충실해야겠습니다. 새로운 시선으로 결단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카르페디엠(Carpe diem), 현재를 충분히 즐겨야겠습니다. 니체의 처방에 따라 망치를 들고, 어린아이처럼 살아봐야겠습니다. 남겨진 가을만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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