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교육청 장학관 신경희

오늘도 어김없이 쉰 새벽에 깨어 블라인드 틈을 손가락으로 열었습니다. 일어나자마자 바깥 풍경을 살피는 것은 오래된 습관입니다.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밤안개의 꼬리가 금강 하류 쪽으로 방향을 트는 게 보였습니다. 햇볕이 뜨겁고 무척 더우려나 봅니다. 안개 낀 날은 늘상 그랬으니까요.

삶이 통근생활이다 보니 누구보다도 날씨에 민감합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 뉴스나 인터넷으로 ‘내일의 날씨’를 확인하곤 하지요. 안개가 자욱하던 날, 예상과는 달리 하늘이 내내 잿빛이더니 장맛비가 내렸습니다. 이 쪽 저쪽으로 왔다 갔다 하며 게릴라성으로 뿌리는 장맛비. 이 지루한 우기(雨期)가 견디기 힘듭니다.

그런데, 이런 나날도 곧 끝나겠지요. 그렇다고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불볕더위가 견디기 쉬운 건 아닙니다. 눅눅하고 침침한 것 보다는 뽀송뽀송함이 헐 나을 것 같아 서지요. 그때가 되면, 소낙비라도 한 줄금 내렸으면 하고 또 맘이 바뀔지 모릅니다. 그러고 보면, 사람 마음이란 게 참 간사해요. 그죠.

6층 사무실 뒷자리에 열 대 여섯 개 화분들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잘 보살피지 못합니다. 갈증을 호소하는 아우성이 들려 올 때야 비로소 물을 한 번 씩 주곤 한답니다. 그것마저 못할 때가 있지요. 그런 땐 미안하지만, 주인 잘못 만난 그들의 운명이라고 그냥 치부하고 만답니다.

엊그제는 큰 맘 먹고 물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나, 난에 꽃대가 올라와 있는 겁니다. 너무 반갑고 기특해서 주위 동료들에게 “이것 좀 보라며”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어휴 신기하네요, 좋은 일이 있을 건가 봐요” 한마디씩 건넸습니다.

뒷자리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그동안 너무 무심했습니다. 매일매일 무언가에 지고 망연히 앉았는데, 난은 꽃대를 올리고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주인장은 세상 일로 참혹해하거나 말거나. 그렇습니다. 실의에 젖어 있거나 말거나 그녀는 연두 빛 맑은 꽃을 피웠습니다. 순간 뼈와 살 사이가 시큰해졌습니다.

늘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스스로 제 빛깔과 이름을 만들어 가고 있었던 겁니다. 기특하기 그지없습니다. 대부분 휴가를 떠나는 데, 억울해할 것 없다고. 지는 날 많은 게 인생이라고. 측은한 빛깔로 나를 바라봅니다.

햇살 제대로 받은 적 없습니다. 감질나게 살짝궁 다녀가는 햇살간지럼에 터진 귀한 미소입니다. 그래서 더 시린 난꽃 향기에서 깊은 산골 숲 향기가 납니다. 오늘도 애썼다고, 가파른 순간순간을 잘 건너왔다고 나를 토닥입니다. 연한 빛깔 여린 몸에서 위안을 받습니다.

사람에게서 위로보다는 상처를 더 많이 받는 날. 해장국 한 그릇보다 따뜻한 사람이 많지 않은 날. 나도 나를 감당하기 힘든 날. 내가 나를 데리고 다니는 일이 어색한 날. 앞차를 쫓아가듯 하루를 보내고 초록에 물을 줍니다. 꽃잎을 한참 바라봅니다.

생의 갯가에는 밀물과 썰물이 있는 법이라고. 오늘도 애썼다고, 가파른 순간순간을 잘 건너왔다고 지그시 잡아줍니다. 눈물 한 방울이 깜빡깜빡 지켜봅니다. 그대 숨결 같은 바람이 세상에 가득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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