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교육청 장학관 신경희

언제 타올랐냐는 듯 앞산에 고운 잎이 다 졌다. 화려했던 단풍들을 보내고 벌거벗은 나무들만이 쓸쓸함을 감춘 채, 의연하게 서 있다. 달랑 한 장 남은 달력 앞에 마음이 분주하다. 요즘 교육청은 그 어느 때보다 바쁘다. 각종 사업 마무리는 물론, 내년도 계획을 수립해야 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지난주에도 큰 행사를 두 번이나 치렀다. 행사를 기획할 때면, 무엇보다 취지에 맞는 최대한의 지원과 대상자에게 걸 맞는 강사를 선정하는데 힘을 기울이곤 한다.

지난 주 행사 중의 하나는 특히, 어려운 시기에 학교경영을 하며 3월부터 굽이굽이 곡절을 돌아 지금까지 달려 온 교장선생님들을 위한 행사라서 더더욱 그랬다. 그동안의 틀에서 벗어나 색다른 분야에서 활동하는 분을 강사로 초청했다. 그 중 한 사람이 우리고장 출신 김응수 배우다. 교육계와는 과히 연관은 없지만, 남다른 연기 인생을 살아 온 배우의 삶을 엿보는 것도 괜찮을 성싶어서였다. 사전에 여러 분들의 의견을 들어 보기도 했다. 주관자로서 그만큼 부담이 됐기 때문이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초청을 했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다. TV 화면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점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교육계와는 다른 삶을 사는 인생, 솔직하고 진솔한 그의 매력 때문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강의를 들으면서 인상적이었던 점은 “내 인생과 예술세계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이다”라는 말이었다. 그의 연기철학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었다.

김 배우는 “공자가 논어에서 ‘술이부작(述而不作: 선인이 학설이나 이론을 기술할 뿐 자기의 생각을 가미하여 창작하지 않다)’라고 표현했다. 논어를 읽으면서 느낀 부분이 많았는데, 이 글을 읽으며 내 인생과 예술세계를 이렇게 살아야 겠구나라고 다짐하게 됐다”며 “내가 한 인물을 창조할 때도 억지로 만든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보면서 깨달아야 한다. 예를 들어 교장 역할을 한다면, 진짜 교장이 되는 것이 아니라 ‘김응수’만의 교장을 연기해서 ‘진짜 교장 같다’는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이라고 신념을 드러냈다. 잔잔한 감동이 일었다.

지난 9월에 방영된 팩추얼 드라마 <임진왜란 1592>를 통해 소름끼치도록 살벌한 표정 연기를 보면서 그의 연기가 탄탄한 내공의 저력을 가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호흡의 장단과 완급을 조율할 줄 알고, 치고 빠지는 기교가 능란한 술이부작(述而不作)의 진경을 아는 연기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보는 일은 사람을 철학적이고 사색적으로 만든다. 인생은 제각각 다 위대하고 찬란한 것이다.

술이부작(述而不作)하니까 더불어 생각나는 책이 있다. 김정운 박사의 <에디톨로지>다. ‘에디톨로지’(Editology)는 김정운 박사의 신조어다. 이 책에서 김 박사는 “세상의 모든 창조는 이미 존재하는 것들의 또 다른 편집이다. 모든 것은 더하거나 빼거나 구성을 달리하거나 조합을 달리하여 편집된 결과물이다. 창조는 편집이다”라 말했다. 공자가 <논어>에서 말한 새롭게 만든 것이 없고 단지 옛것을 새롭게 기술했을 뿐이라는 의미와도 일맥상통한다.

어김없이 순환되는 계절에 순응하며 침묵과 맞닿으면 알게 된다. 새로움도, 나를 사랑하고 나를 지키는 힘도, 남을 흉내 내지 않고 나답게 사는 일도 모두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김 배우가 최근 KBS <강연 100℃>에서 ‘나는 나다’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저에게는 인기나 돈보다 더 가치 있는 게 있거든요. 나를 사랑하고 나를 지키는 거죠. 남 흉내 내지 마세요. 여러분답게 사세요” 했던 그 말이 귓전을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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