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교육청 장학관 신경희

축복은 그 숨 막히는 무더위 속에 있었던 것임을 여름의 끝물에 한 알의 포도 알을 깨물면서 문득 알게 된다. 수많은 과일들을 지상에 차려 놓고 힘센 여름은 물러가고 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아침저녁으로 쫄깃해진 공기. 하늘은 높아지고 너머 너머의 강이 말을 걸어오고 강물처럼 그리움도 깊어간다. 그렇게 8월이 가고, 백로 지나 추석이 문밖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오랜만에 대전에서 귀한 손님들이 오셨다. 일 년에 두 세 차례 찾아올까 말까하는 분들인데 반갑게 맞이하질 못했다. 지난 9월 인사에서 옆자리로 옮긴 탓에 바쁘다는 핑계로 차 한 잔 제대로 대접하지 못한 것이 지금도 맘에 걸린다. 다행스럽게도 다른 분이 식사자리를 마련하고 초대까지 해줘서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좋은 사람들과 좋은 자리에서 함께 식사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 일인가.

그 날, 그 식당 방에 걸려있던 걸개 글이 생각난다. 맛깔 나는 전라도 사투리조의 글귀가 얼마나 멋들어지던지. 함께한 자리를 한층 북돋워 주었다. <사는 게 별거시다요 마음 나눈 사람끼리 오순도손 마주보고 앉아 된장찌개 끓여 놓고 밥 한 그릇 맛나게 먹는 거. 사는 게 별거시다요. 진실한 사랑 나눈 사람끼리 도란도란 얼굴 마주보고 앉아 정담 나누며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는 것이제> 다시 봐도 감칠맛이 돈다.

‘사는 게 별건가’되 뇌이다 보니 생각나는 시(詩)가 있다. 이정록 시인의 <의자>다.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에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것이여>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것이여’별것 아닌 것에 별 것을 발견해내는 즐거움. 사소한 일상에서 삶의 행복을 길어 올릴 때의 감동이 전해져 온다.

겨드랑이가 가려울 때 힘껏 날개를 뻗쳐도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있다. 커다란 욕망에 휘둘려 발만 동동거리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본다. 일상의 소소함속에서 때로는 좋아하는 드라마 한편에, 때로는 자식 놈들의 말 한 마디에, 때로는 친구의 농담 한마디에 그저 웃음 짓고 살아가는 것이 참 행복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행복이지 않을까.

벌써 한 해의 허리가 접힌 지 오래다. 무덥던 여름 낡은 그림자를 감싸 안고 밤이면 찌르륵 찌르륵 귀뚜라미가 운다. 불어오는 바람에 잠시 쉼표를 찍으면서 내 마음의 저울에 나를 얹어 달아 본다. 안으로 안으로 고개 숙이는 계절. 바람과 구름과 태양의 비밀을 잉태한 작은 생명들이 우루루 탄생하고 있다. 나도 그들처럼 그렇게 익어가야 할 텐데.

가을 햇살이 여유 있게 넘실대는 것도 느낄 새 없이 가을은 서둘러야 하는 발걸음처럼 총총 떠나 버릴 것이다. 그러니 하늘이 호수처럼 맑고 깊어진 날. 국화꽃 향기 천지에 빗물처럼 스미는 그런 날을 한껏 느끼며 살아야 할 일이다. 가을 문을 나서니 바람이‘사는 게 별거시다요’라며 반갑게 손을 잡아준다.

저작권자 © 대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