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교육청 장학관 신경희

오월부터 시작된 무더위가 유월 접어들면서 기승을 부리더니만 바람 불며 비가 내린다. 일기예보는 남쪽에선 벌써 장마 시작이라 한다. 아마도 지금 내리는 비는 여름 머리쯤을 적시는 비일 게다. 이왕지사 내리는 비를 타고 한없이 내려라. 버석거리던 세상이 추적추적 젖고, 풀풀 먼지 일던 마음이 촉촉이 가라앉을 때까지.

잠시 일을 덮고 창밖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다. 바람에 실려 온 빗방울들이 하염없이 창문에 부딪히며 흐른다. 흑백영화처럼 번져오는 뻐근한 그리움. 이렇게 비오는 날엔 마음에 꼬깃꼬깃 접어둔 누군가 보고 싶어진다. 때로는 명함처럼 지갑 속에 갇힌 사랑도 있나니.

비가 내리면 평소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바깥세상은 물론이고 몸도 마음도 어느새 우울 모드로 전환돼 버린다. 함부로 그린 생각들은 소용돌이치며 뒤섞인다. 생각의 줄기를 잡으려니 덜 익은 채 몇 해를 넘긴 열매들. 죽은 채 뒤엉킨 뿌리까지 딸려 나온다.

욕망은 멈출 줄 모르고 수렁은 더 깊어지는 세상살이에 무거운 발걸음으로 얼마를 걸어왔는지. 여기는 어디인가.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나팔꽃, 칡꽃, 넝쿨장미처럼 위로위로 올라가려는 세상의 모든 손들이 생각난다. 문득‘눈처럼 비처럼 걸어가고 구름 친구하며 이만큼 저만큼 바람처럼 서는 법을 배우련다’던 시인의 말이 그립다.

나이는 아픔을 발효시킨다는데 이 나이 먹어도 나는 왜 그럴까. 생(生)이 왜 이렇게 마냥 허기지고 뜨거운 안개만 쌓이는 건지. 눌러도 눌러도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욕망, 두피를 뚫고 뻔뻔스레 고개 내미는 집착, 끊임없이 일어나는 잡념의 이파리 모조리 따내고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채 묵언참선에 들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좋은 발걸음으로 더 이상 흔들리지 않고 걸어갈 수 있게.

출발신호가 떨어진 듯 매일 전속력으로 달리는 삶 속에서 놓치고, 잃어버리고 사는 것들은 어찌해야 하는 것인지. 모른 채, 아닌 채 살아 갈 자신은 있는 건지. 비 내리는 흐릿한 허공에 묻는다. 자신의 한계를 고려하지 않은 채 달리는 삶. 이제부터라도 조금만 천천히 잠시만 느리게 그렇게 가라. 빗소리가 정수리를 친다.

오늘처럼 비 내리는 날이면 마종기 시인의 <비 오는 날>이 생각난다.‘구름이 구름을 만나면 큰 소리를 내듯이 아, 하고 나도 모르게 소리치면서 그렇게 만나고 싶다 당신을. 구름이 구름을 갑자기 만나면 환한 불을 일시에 켜듯이 나도 당신을 만나서 잃어버린 내 길을 찾고 싶다. 비가 부르는 노래의 높고 낮음을 나는 같이 따라 부를 수가 없지만 비는 비끼리 만나야 서로 젖는다고 당신은 눈부시게 내게 알려준다.’당신이란 이름이 젖은 향기가 우울한 몸속으로 자연스레 걸어 들어온다.

누군가 말했다. 비오는 날은 사랑한 죄, 사랑하지 않은 죄 모든 것을 용서한다고. 나도 오늘처럼 비오는 날은 모든 것을 용서하리라. 또 다시 알게 모르게 죄지으며 살 텐데. 비아냥 들으면서도 마음 다잡는 이유는 그래야 그나마 허물을 덮어주는 고운 눈길로 삶을 지켜낼 수 있을 테니까.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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