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도교육청 장학관 신경희

11월 13일에 금요일. 많은 일들이 잡혀 있었다. 서울출장, 수업혁신을 위한 배움 수업축제, 글을 씁네 하며 발을 들여 놓은 서림문학회 문학의 밤, 전시회, 지인의 자혼 피로연 등. 일 년에 딱 한 번 있는, 아니 누군가에겐 평생에 한 번인 행사도 있었다. 어느 것을 택해야 할지 난감했다. 결국 공직자로서 1박 2일 출장을 갈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다른 행사들은 접어야 했다. 안 좋은 일이 생긴다는 13일의 금요일. 공교롭게도 그 날은 최악의 동시다발 파리 테러가 발생했다. 비는 종일토록 주룩주룩 내렸다.

가을비 한 번에 내복 한 벌이라 했는데, 비 그친 후에도 기온은 내려가지 않았다. 만추의 햇살에 단풍 빛이 눈부시던 일요일. 미루고 미뤄둔 쪽 마당 대청소를 했다. 오후에서야 여유를 찾았다. 그 제서야 문학회원인 K시인의 판각화 전시회 마지막 날이 생각났다. 한 곳이라도 사람 노릇을 해야 했다. 부랴부랴 찾아갔다. 직접 만들어 벼른 칼을 사용해 그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조각된 60여 편의 작품들이 은은한 옷을 입고 조명 아래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는 서면 끝자락 항구에 사는 노총각이다. 서각을 전공한 것도 아니요, 그 흔한 공모전에 출품한 적도 없는 사람이다. 일이 없어 공친 날에는 바닷가를 거닐고 책을 읽으며 심심할 때면 시를 쓴다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바닷가에 떠밀려온 나무 조각을 주워 취미로 판각을 했다. 언젠가 가뭄에 콩 나듯 나가는 모임에서 그가 들고 나온 작품 몇 점을 만난 적이 있다. 투박했지만 서각의 지루함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색감들이 살아 꿈틀거렸다.

외로울 때마다 시를 쓰면서 얻은 문학적 영감을 나무판에 칼을 넣고 회화화(繪畫化) 해왔던 것이다. 우연이 그저 운명이 되지는 않는다. 문득‘오직 땀으로 준비한 사람에게만 재능은 공명하여 위대한 창조적 작품을 선사한다’말이 떠올랐다. 6~7년 동안 땅속에 있다가 세상 밖으로 나오는 매미의 모습처럼 그는 이번 전시회를 통해 숨겨진 재능을 수면 위로 드러냈다. 작품들은 어느 방향에서 봐도 반드럽고 어연번듯했다.

그의 재주가 부러웠다. 무더기로 피어오른 코스모스, 황홀하게 물든 단풍잎, 그게 무엇이 됐든 아름다운 풍광을 만날라 치면, 한 폭의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어 안달한다. 그런 재능을 가졌으면 얼마나 좋을까. 간절해진다. 언젠가는 나도, 그러면서 산다. 간절함은 늘 가슴속에 붉은 댕기처럼 남아 있다.

좋은 작품은 첫눈에 평범하고 담백해 보이지만 보면 볼수록 정신적 차원이 드러나는 것이라 한다. 하지만 나는 무엇이든 첫눈에 강렬함으로 다가오는 것이 좋다. 그런 작품들을 만나면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어진다. K시인의 전시회 판매 작품을 고를 때도 그랬다. 가까이서 또 조금 멀리서 작품들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이상하게 강렬한 색상에 자꾸 시선이 가고 그런 게 좋으네”그걸 들었는지 K 시인은 어느새 다가와“누님 마음이 아직 청춘이라 그래요”그런다.

“머리는 날이 갈수록 하얘지는데 가슴은 날이 갈수록 붉어진다. 마음은 색동옷을 입고 있는데 몸이 늙어가니 슬프다”던 어느 원로 작가의 인터뷰가 생각난다. K시인. 그는 또 '침묵의 10년'이라는 땀의 계곡을 외롭게 행진할 것이다. 더 깊이 몰입하고 헌신하여 내공을 쌓아 갈 거다. 자연스럽게 창의성과 통찰력 넘치는 걸작들은 그의 곁에 하나 둘 서게 되리라. 불현 듯 어느 날 또 다른 전시회 소식을 전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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