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도교육청 장학관 신경희

지난주에는 이곳저곳으로 출장을 다니느라 며칠 사무실을 비웠다. 오랜만에 출근한 날. 밀렸던 결재와 자료들을 살피고 정리하느라 몹시 부산했다. 숨찬 시간들을 떠나보내고, 늦은 오후에서야 차 한 잔을 마시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 때 불현듯 떠오르는 용어가 있었다. 출장길에 읽었던 책에서 우연히 만난 심리학 용어다. 아주 오래전에 설핏 만나 기억에서조차 가물가물해진 윤형방황(輪形彷徨)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은 눈을 가리면 길을 똑바로 걷지 못한다. 20미터 정도 걸으면 실제로는 4미터 정도의 간격이 생기고, 계속 걷게 되면 결국 큰 원을 그리며 돌게 된다. 이런 현상이 윤형방황(輪形彷徨)이다. 어떤 등산객이 알프스에서 길을 잃고 13일 만에 구출되었다. 구조된 후 인터뷰를 해 보니 그는 그곳을 빠져 나오기 위해서 매일 12시간씩 필사적으로 걸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가 발견된 곳은 길을 잃은 곳에서 불과 6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이었다.

왜 이런 일이 생긴 걸까. 설산이나 사막과 같이 똑같은 곳을 걷거나 짙은 안개나 폭풍우를 만나 시야가 가려졌을 때에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자리를 맴돈다는 것이다. 사람은 눈을 감거나 어두운 곳에서는 방향감각이 둔해지거나 상실된다. 20미터를 걷지만 고작 4미터밖에 나가지 못하고, 100미터를 걸어도 원을 그리면서 제자리에 머무르게 된다. 방향 감각을 잃고 원을 그리듯이 목표에서 빗나간 걸음을 걷는 윤형방황 현상을 오지를 탐험하거나 등산하는 사람들은 가장 경계한다고 한다.

비단 그들만이 경계할 일은 아닌 듯싶다. 지금 나의 삶은 어떠한지 돌아보게 한다. 살아가면서 목표를 세우고 무슨 일을 의욕적으로 출발하지만 그저 주변에서만 맴돌고 있는 모습을 경험하곤 한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자기변화란 게 참 쉽지 않다. 분명한 꿈과 목표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순간순간 자리에 멈춰 서서 주변을 살피는 셀프 피드백이 있어야 헛돌지 않고 바르게 나아갈 수 있다.

아무리 열심히 걸어도 사막의 끝이 보이지 않을 때, 갈등과 권태의 사막에서 벗어나는 길은 우선멈춤은 아닐 런지. 우중충한 현실에 삶의 동반자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멀리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이 있다. 인생은 짧은 듯해도 멀리 가는 길이다. 그 길에는 동반자가 필요하다. 비전이나 정서를 공유하고 마음이 맞는 웅숭깊은 동반자는 삶에 큰 힘을 주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정신없는 세상에서 우리가 사는 이치도 윤형방황과 크게 다를 것 같지 않다. 분명 바쁘게 살고 있지만, 그동안 무엇을 했는지 잘 모를 때가 많다. 눈을 부릅뜨고 살았지만 눈을 감고 산 것과 다를 것이 없는 현실이다. 어느새 인생길에서 50보 이상을 걸어왔다. 얼핏 열정적으로 사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내 자신의 발자국만 따라서 빙빙 돌고 있지는 않은지. 이제는 정말 수시로 멈춰 서서 삶을 가늠하며 윤형방황에 빠지지 않는 지혜가 절실할 때이다.

가을이 알록달록 깊어간다. 쨍하니 하늘 파란 날에는 이유 없이 마음이 에리다. 핑하니 눈물이 돈다. 깊숙이 파고드는 가을 햇살에 나를 가만히 말리며 생각한다. 아무리 바빠도 잠시 멈춰 서서 나를 돌아보고, 남의 말에도 귀 기울이며 좋은 책을 읽는 그런 시간을 만들어 봐야겠다고. 적어도 가을은 그런 계절이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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