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서천교육지원청 교육과장 신경희

침묵으로 한없이 내려앉은 일요일 오후. 세상이 무문토기처럼 불투명하다. 숨결마저 회색빛에 갇힌 날엔 특별히 그리운 것들이 많아진다. 희끄무레한 하루가 신신파스처럼 욱신거린다. 하염없이 생각을 만지작거리다 시(詩)한 편을 떠먹는다. 오늘의 또 다른 밥이다. 시가 밥이 된지는 오래 됐다. 허기진 배를 채워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 것들이 있어 먹기 시작한 것이 시(詩)다. 누군가는 배를 잡고 웃을 일이다.

비록 실 같이 가늘어졌지만 내겐 지금껏 버리지 못하는 꿈이 있다. 멍울진 마음을 한 올 한 올 풀어내어 시(詩)를 쓰는 것이다. 내 숨겨진 여명을 읽어낸 어느 지인은 가끔 용기를 쥐어주기도 했었다. 그 손길로 한 때는 꿈과 절망과 질투를 버무려 열망을 끄적거렸다. 하지만 마냥 그 자리를 맴돌 뿐, 흉내 이상을 벗어나질 못했다. 오히려 자괴감만 깊어갔다. 끝내 끄적거리는 일조차 내동댕이 쳐버렸다. 그러나 간절한 것은 통증이 있어서 어느 날부터 시(詩)를 골라 먹기 시작했다. 그런지가 십여 년이 다 돼간다. 어느 날은 너무나 허전하고 견딜 수 없어 허겁지겁 수십 편을 과식하기도 한다. 가보지 못한 길은 영원히 허기진 그리움이다

오늘의 밥은 김부조 시인의‘곡선에 물들다’이다.‘강물이 때때로 마을을 휘돌아 흐르는 것은 결코 휘어짐이 아니다/강물은 풍문으로 떠도는 그 강 끝의 비밀을 가리기 위해 곡선의 묘미를 넌지시 곁눈질할 따름이다/강물이 때때로 굽이진 노래를 부르는 것은 결코 무너짐이 아니다/강물은 비켜설 수 없는 올곧음과의 상생을 위해 곡선의 멋을 슬며시 흉내 낼 따름이다/인생의 길은 그 끝이 가려진 곡선/ 내가 기꺼이 둘러서 가는 것은 그 곡선에 물들기 위함이다’

오늘은 직선만이 선이 아님을, 올곧음만이 삶이 아님을 알려주는 밥을 먹었다. 휘어짐이 아닌 무너짐이 아닌 그러한 곡선에 물들기 위해 기꺼이 둘러서 간다는 시인의 말에 내 마음 회로에도 자장이 일렁거린다. 인생의 길은 곡선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안달하며 살아가는 건지 모른다. 나이 들면서 부쩍 떠 올리게 된 시(詩)가 있다. 짧지만 깊은 감동, 진한 울림을 주는 고은 시인의‘그 꽃’이다.‘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시(詩)는 분명 내 안에 허기짐을 채워주는 밥이다. 밥은 곧 살아있음의 증거다.

모든 게 인연 따라 간다. 눈에 보이는 사물이 인연으로 엮여있다. 사람과의 인연도 그렇지만 내가 만나는 시(詩)도 그렇다. 그 인연은 매일 일어난다. 아무리 많은 인연이 닿아도 그것을 느낄 수 있는 육감을 지닐 때만이 비로소 꽃으로 피어난다. 피천득은‘어리석은 사람은 인연을 만나도 몰라보고, 보통 사람은 인연인 줄 알면서도 놓치고, 현명한 사람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을 살려 낸다’하지 않았던가.

혼자 있는 휴일엔 늘 바람이 분다. 그 바람이 먼저 나를 읽는다. 정신없이 나를 넘긴다. 아직 쓰여 지지 않은 페이지까지. 오늘도 나는 인생이라는 미지의 여행에 시(詩)를 동반하여 함께 간다. 추억과 그리움으로 잉태된 시(詩)들을 골라 먹으며 결코 달음질 하지 않는 내 삶의 진짜 여행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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