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서천교육지원청 교육과장 신경희

지인의 초청으로 나간 자리였다. 벌써 몇 주 전부터 무조건 시간을 비워두라는 말에 다른 일정 다 재낀 터였다. 친분 있는 분들 몇이 만나 저녁식사라도 하려나 보다 생각했었다. 그런데 예상 외로 준비된 송년회장 이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우리지역 출신 유명한 서예가 선생님은 서울에서부터 내려와 손수 음향시설 세팅을 마친 상태였다. 각계각층의 출중한 분들이 하나 둘씩 모여 들었다.

처음엔 좀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귀한 분들을 만날 수 있는 자리에 함께 할 수 있음 에 감사했다. 평소 취미로 익혔다는 섹스폰 연주는 물론, 유명 가수 뺨치는 노래 실력들도 대단했다. 대부분 연세가 연만한데도 지칠 줄 모르는 그 열정이 부러웠다. 요즘은 제 나이에 0.8을 곱한 나이가 진짜배기라더니 아주 틀린 말도 아닌 것 같다.

분위기가 한층 무르익어가고 있을 즈음 일반적인 송년회장에서는 볼 수 없는 기이한 장면이 펼쳐졌다. 언제 준비를 했는지 순간 먹물과 보기 드문 큰 붓이 함께 등장했다. 바닥에는 재빠르게 커다란 한지가 펼쳐지고 장내에는 묵향이 번졌다. 서예에 조예가 깊은 몇 분들이 세밑, 새해 덕담을 멋지게 일필휘지했다. 명망 있는 서예대회를 지켜보듯 모두들 숨죽인 모습이 사뭇 장엄했다. 붓을 잡은 분들은 하나 같이 먹물을 바른 손바닥을 찍어 작품을 마무리했다. 분명한 특별 이벤트였다.

송년회장은 다시 흥이 오르고 술잔이 오고 갔다. 그런 사이 어떤 분인가 “사람은 경우가 있어야 한다. 이 세상은 경우만 있으면 다 된다”라는 말을 했다. 나는 열렬히 공감하며 맞장구를 쳤다. 어릴 때부터 친정아버지는 사람을 칭찬할 때 ‘그 사람은 경우가 바른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시곤 했었다. 어려서부터 들어온 그 ‘경우 바른 사람’ 이 아주 특별한 송년회장에서 새삼 가슴에 와 닿았다.

교육자의 길을 걸어오면서 가슴에 담고 살아온 단어 중 하나가 바로 ‘경우’다. 나는 지금도 경우 바른 사람을 기르는 것이 진정한 교육이라는 생각에 한 치의 변함이 없다. 경우가 바르다는 것은 무엇일까. 가끔 경우가 바르다는 것은 마이클 샌델 교수가 말한 ‘현실 속의 구체적 정의’는 아닐까 생각을 한다.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 즉 상황에 맞는 판단과 말과 행동이 바로 경우가 바른 것이다.

사실 경우에 맞는 적절한 생각과 말과 행위를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날마다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경우 바른 사람이 된다는 것이 너무나 어렵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평생을 두고 배우고 연구하고 실천해도 완성할 수 없는 난제인지도 모른다. 경우가 바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계속 배우고 실천해야 하며, 자기 성찰과 견문을 넓혀 나가야 하는 것이다. 지식과 지혜는 하루아침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나 한 해가 저물 무렵이면 지난 시간들을 뒤돌아보게 된다. 연초에 했던 숱한 다짐과 이루지 못한 일들로 인해 자괴심이나 후회를 갖기 마련이다. 그러나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터키 시인 나짐 히크메트의 ‘진정한 여행’ 시를 떠 올리며 다시 희망을 노래한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리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는 날들…’ 지금까지 이뤄진 것, 여태까지 겪은 것들은 모두 예고편일 뿐이라지 않던가. 을미년 새해에도 가슴 뛰는 희망으로 보다 깊은 호흡으로 유연하게 판단하며 경우 있게 행동하며 살겠노라 송년에 다짐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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