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서천 서면중학교장 신경희

요즘 퇴근하여 현관문을 열면 조용한 공간에서 맨 먼저 달려 나와 반겨주는 것이 있다. 잘 익은 탱자의 노란 향기다. 친정어머님이 동네 어귀에 아직도 버티고 있는 탱자 울타리 밑에서 주워 온 것들. 둥글둥글 탱자만의 끈적끈적한 피부결 탓에 먼지가 달라붙어 꼬질꼬질해진 몸을 일일이 수세미로 깨끗이 닦아서 한 바구니 가져다 놓으신 이후부터다. 팔순에 가까운 어머니 마음은 언제나 소녀에 머물러 있다. 밭농사 일로 바쁜 일손 중에도 봉숭아, 채송화, 백일홍, 꽈리, 맨드라미 등 철철이 꽃들을 심고 가꾸시며“저렇게 예쁘게 피었는데, 한번은 봐 줘야 하는 거 아니냐?”시며 함께 느끼고 탄성하길 원하신다. 매년 이 맘 때쯤이면 잘 익은 꽈리 열매들을 마늘, 양파 엮듯이 꼼꼼히도 엮어다 놓으시곤 한다. 그래서 가을이면 우리 집 거실에는 낯익은 정물화가 놓인다. 노란 탱자와 상사화 빛깔 꽈리 꾸러미, 딱딱한 연꽃 씨를 물고 있는 갈빛 연밥들이 수채화 물감 같은 표정으로 한데 어우러져 바라보고 있다. 그렇게 그려진 정물화는 새 봄이 오고 나서야 비로소 그 자리를 떠나게 된다.

귤이 귀하던 시절, 탁구공 만하게 잘 익은 노란 탱자를 반으로 쪼개어 빨아먹곤 했다. 새콤달큰(?) 떫고 쌉쌀한, 딱히 뭐라 표현하기가 참 어렵다. 한번 쯤 그 맛을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그런 맛이다. 필수 영양소의 하나인 비타민 C가 가득 들어 있는 아주 좋은 친구였다. 지금도 그 때 생각을 하면 입안에 침이 돌며 신물이 가득 고인다. 나에게 탱자는 내 유년 시절의 그리움의 대상이며 빛깔이고 맛이다. 우리 집은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 울타리였다. 그 시절 우리 동네는 탱자나무를 울타리로 한 곳이 많았다. 지금이야 탱자나무 울타리를 볼 수 없으며, 관상용조차도 보기가 힘들어 탱자나무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사람도 많다.

매화로 시작해서 앵두, 살구, 민들레 꽃 등 각종 봄꽃과 더불어 5월이면 하얀 탱자 꽃들이 가시 사이를 용케도 비집고 피어났다. 그 꽃을 지우며 자라난 열매들은 매실보다 더 짙푸르렀다. 앙징맞은 열매를 따서 남동생들과 구슬치기도 하고, 굽어진 탱자나무를 이용해 필드하키(?)도 했었다. 이런 비밀을 간직한 탱자는 유년의 그리움으로 일어서서 나에게 달려온다. 가을이면 노랗게 익어 독특하고 강한 향기가 오랫동안 지속되어 방안과 자동차 속에 놓아두면 곰팡이와 같은 좋지 않은 냄새를 없애 주는 훌륭한 방향제 역할도 톡톡하게 해냈다. 그런데,‘탱자탱자’하면 좋지 않은 의미로 쓰인다.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뒹굴뒹굴 놀거나 딴 짓 하거나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들을 '탱자탱자 놀고 있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탱자탱자’는 맛도 없고 별로 쓸모없는 탱자나무 열매, 즉 하찮은 것을 비유하곤 한다. 옛말에도 '귤이 회수(淮水)를 넘으면 탱자가 된다.'라고 해서 씨가 같더라도 환경이 다르면 엉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뜻으로 품질이 떨어지는 물건이나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었다. 중국 춘추시대 고사 가운데‘귤화위지(橘化爲枳)’란 말이 있다. 춘추시대 제나라 재상 안영이 초나라에 사신으로 가자 그의 기를 꺾기 위해 초나라 영왕이 제나라의 도둑을 잡아놓고“제나라 사람들은 도둑질하는 버릇이 있는 모양이다”라고 비아냥거렸다. 이에 안영은“귤나무는 회수(淮水) 남쪽에서 자라면 귤이 열리지만 회수 북쪽에 심으면 탱자가 열린다고 합니다. 저 사람도 초나라에 살았기 때문에 도둑이 됐을 것입니다.”라고 응수했다고 한다.


맛도 없고 별로 쓸모없는 것으로 비유되곤 하는 탱자가 지닌 효능을 알고 보면 대단하다. 5, 6월에 채취한 미성숙 열매를 쪼개 말린 것을 한약재명으로는 지실(枳實)이라 하며, 성숙기가 가까운 7, 8월에 채취해 절단한 후 말린 것을 지각(枳殼)이라고 한다. 둘은 구성 성분이 비슷하지만 한방에서는 구분해 사용하고 있다. 탱자는 소화기 계통은 물론이고 부기 내림에도 좋고, 아토피나 변비 치료 및 노폐물 배출 등에 탁월한 효능이 있다고 하니‘탱자탱자’놀릴 일만은 아닌 듯 싶다. 또한 탱자나무 울타리는 적을 방어하는 목적도 담겨 있었다. 날카로운 가시로 인해 도적을 막고 귀신을 쫓기도 했다고 한다. 강화도에 있는 400여년 이상 된 천연기념물 탱자나무는 외적의 침입을 막을 목적으로 심은 것 중 남은 일부라고 한다. 서산의 해미읍성은 도적의 접근을 막기 위해 성벽 둘레에 탱자나무를 심어서 탱자성이란 의미로 지성(枳城)이라고도 했다는 것을 보면 가히 짐작할 수 있다.

탱자가 품고 있는 이야기야 어찌됐든 탱자는 내 유년의 돌아가고픈 추억이고, 아련한 그리움이다.‘자전거 탄 풍경’의‘너에게 난 나에게 넌’노랫말처럼 너에게 난 해질녘 노을처럼 한 편의 아름다운 추억이 되고, 소중했던 푸르던 날을 기억하며 후회 없이 그림처럼 남아주기를. 나에게 넌 초록의 슬픈 노래로 내 작은 가슴속에 이렇게 남아 반짝이던 너의 예쁜 눈망울에 수많은 별이 되어 영원토록 빛나고 싶다. 사무치게 사랑해 보지 못한 사람은 밤하늘의 빛나는 별을 볼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우리는 몇 번이나 별을 보며 살아온 것일까? 깊어지는 가을 밤하늘에 별들이 그리움이 가득하다.
저작권자 © 대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