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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시명 술 평론가·막걸리학교 교장


안동에 갔더니, 금칠한 잔을 만드는 분이 계셨다. 금잔에 차를 마시니 차맛이 달랐다. 잠시 현혹된 듯하여 다시금 마셔보니 금잔의 차와 유리잔의 차맛이 달랐다. 신비로워서 금잔 세트의 가격을 물었더니 100만 원이 훌쩍 넘었다. 금값이 비싸기에 그런가보다 하고, 흥정도 못하고 말꼬리를 내렸다.

그런데 안동을 벗어나는데 내 눈에 온통 황금이 일렁였다. 추수를 앞둔 들판이 온통 황금판이었다. 가을 단풍이 아름답다지만, 가을 들녘만큼 아름다운 단풍이 없다. 가을 들판을 가로지르는 나는, 황금잔 속 떠있는 작은 찻잎 같았다.

농사 기법이 발달하여, 어지간한 자연 재해가 닥쳐도 어김없이 풍년이 온다. 하지만 농촌은 풍요롭지 못하다. 벼 수매가 걱정을 해야 하고, 논을 갈아엎고 심을 대체 작물을 찾기에 여념이 없다. 쌀의 가치를 어떻게 올릴 것인가 해법도 모색하지만 쉽지가 않다.

쌀의 가치를 높이는 방법의 하나로, 농림수산식품부는 술을 고민해 왔다. 술을 권할 수는 없지만, 수입 술이나 수입 원료로 만든 술을 대체하는 국산 농산물로 빚은 술을 부양하고 진흥시켜왔다. 그 정책의 하나가 가을이면 열리는 대한민국 우리술 축제다. 올해는 10월 넷째주 목요일을 아예 ‘막걸리의 날’로 지정했다. 독일의 옥토버페스트, 프랑스의 보졸레누보 출시와 흡사한 대한민국 대표 축제로 발전시키기 위한 전략이다.

우리술 품평회가 2009년에 수원의 농촌진흥청에서 열렸고, 2010년에는 서울 삼성동 코엑스박람회장에서 열렸고, 2011년에는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 평화공원에서 열리게 되었다. 2009년에는 품평회만을 위한 행사였고, 2010년에는 전시 홍보를 위한 행사로 확대되고, 올해는 전시 홍보와 함께 축제 행사로 확대되었다. 게다가 막걸리의 날까지 제정하면서, 해마다 행사를 이어가겠다는 의지까지 표명하였다.


2011 우리술 품평회 경기 예선에 출품된 막걸리

선진 강대국들은 고유한 술을 지니고 있다. 영국의 위스키, 프랑스의 와인, 독일의 맥주, 러시아의 보드카, 중국의 마호타이, 일본의 청주 들이 득세하고 있는 술들이다. 국가의 후원을 받은 이 술들에는 알코올만 담긴 게 아니다. 그 속에는 음식 문화의 세계화 전략이 담겨있고, 자국 농민을 보호하는 전략이 담겨 있다.

올 가을에는 유난히 술 축제가 많았다. 10월 2일에 경기도 양평에서 가양주 주인(酒人) 선발대회, 10월 8일에서 9일까지 경기도 고양시에서 대한민국 막걸리 축제, 10월 8일부터 13일까지 경주 시내에서 경주술떡잔치, 10월 21일에서 23일까지 남한산성에서 경기막걸리 대축제가 열렸다. 그밖에 크고 작은 축제에서 술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졌다. 이는 막걸리 바람이 불면서 그 성과를 향유하고, 이를 통해 지역 관광자원을 개발하려는 노력으로 벌어진 현상이다.

이천도자기 축제장의 도자막걸리 100인 쇼룸에 출품된 막걸리잔

서울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에서 10월 27일부터 30일까지 열리는 2011년 대한민국 우리술 대축제에는 100여개 양조장에서 낸 300여점의 술이 선보인다. 100여개의 양조장 술이 시음을 위해서 한 자리에 모이는 것은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지방자치단체에서 운영하는 8도 막걸리 명품관이 들어서고, 지역 예선을 통과한 115개 제품이 품평회장에서 경합을 벌이게 된다. 막걸리를 맛보러 한국을 찾는 외국관광객들을 유치하려는 노력도 이뤄지고, 햅쌀 소비 촉진을 위하여 햅쌀 막걸리가 전국의 유통 매장에서 동시에 출시된다.

술 축제장은 술을 곤드레만드레 마시자는 공간이 아니다. 칼을 벼리듯이 술을 벼린 장인들이 자신의 작품을 선보이는 자리이고, 소비자들은 그 맛을 가늠해보는 자리다. 쌀로 만든 가장 비싼 상품은 술이다. 쌀이 남아돈다하여 논을 갈아엎을 것이 아니라, 차별화된 양조미를 통해서 논의 가치를 높이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쌀이 넉넉할 때에는 쌀이 술로 변신했다가, 쌀이 부족할 때는 다시 밥으로 돌아올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술을 지키는 일은, 우리 쌀을 지키고 우리 논을 지키는 일이다. 막걸리를 논의 파수꾼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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