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들어서며 총 총 총 바빴다. 짧은 인연이었다. 정들기 시작했던 사람들과의 마음 정리가 생각보다 쉽지만은 않았다. 덜컥 새 임지에서 익숙지 않은 삶에 뒤뚱거렸다. 함께 있을 때는 그 귀하고 좋은 줄을 모른다. 떠날 때야 비로소 아쉬움을 느끼게 된다. 사는 게 다 그렇다. 어느 책에서 보니까 달맞이꽃이 어스름 달빛에 찾아올 박각시나방 기다리며 봉오리 벙그는 데 17분. 꽃잎 활짝 피는 데 3분이 걸린다고 한다. 20분이 달맞이꽃에게는 한 생인 것이다. 그 무엇에겐 한 生이기도 한 그런 시간의 소중함을 느낀다. 그러니 6개월이라는 시간이 결코 짧은 인연만은 아니다. 사계절을 네 번이나 보낸 곳에서 떠날 때도 그렇지는 않았다. 그런데 짧은 인연 앞에 눈물이 났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준 선물 같은 짧
하루하루가 바람처럼 지나간다. 한 장 남은 달력에 얼마 남지 않은 숫자들이 힘을 모아 버텨 보지만 어쩔 도리가 없나 보다.‘시간은 시계의 원형 문자판을 도는 것이 아니라 돌아올 수 없는 저 아득한 어둠 속으로 질주하는 것’이라던 지혜자의 말씀이 불현듯 기억난다. 시작이 그러하듯 12월은 마무리도 중요함을 알게 하는 달이다. 여러모로 아쉬움이 많은 달이지만 더불어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루하루를 산다는 것. 그것은 누구에게나 하나의 진지하고 신성한 경주였음을 깨닫게 한다. 요즘 젊은이들을 상징하는 신조어들이 참 많다. 이른바‘낀 세대라라 불리는 트윅스터’(Twixter)부터 삼포세대, 그루밍족, 캥거루족, 프리터족, 니트족 등이 그것이다. 언뜻 단어만 봐서는 그
마음의 기도로 12월을 벽에 건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중순이다. 이제 정말로 2013학년도 교육농사를 마무리 지을 시기다. 학년 말을 맞아 학교는 어느 때보다 바쁘고 힘들다. 선생님들은 수업은 수업대로 해야 하고 성적처리, 생활기록부 작성, 사정회 등 주요 학사업무를 한꺼번에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부잡스러운 아이들 생활지도는 하루도 방심할 수 없다. 그런데 이맘때쯤이면 일선학교의 학사공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 3학년,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의 정규 수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느니, 일선의 학교 수업이나 체험학습이 대부분 '시간 때우기 식'으로 이뤄진다느니. 학생들이 학교에서 매일 감상하는 비디오가 하루 3∼4편이라고 하더라는 소리들이 거침없이 들려온
사람들을 만나고 부딪치는 일상 속에서 나는 가끔 ‘미늘’을 생각할 때가 있다. 좋든 싫든 한번 이루어진 관계에는 사회적 연계성이든, 그게 뭐든 쉽게 끊어낼 수가 없다. 거기엔 내 성격상의 문제도 얼추 가미되어 있다. 한 순간 훌훌 털어 버리고 싶거나, 원하지 않는 관계인데도 끈질긴 인연의 고리에 단단히 얽매어 있기도 하다. 좋은 사람과의 관계는 더 말할 나위 없다. 그러나 가깝거나 좋은 사이일수록 책임과 기대치가 커지기 마련이다. 때로 거기서 파생되는 실망으로 인해 상처를 입을 때도 있다. 그렇거나 말거나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한, 관계는 끊임없이 새로 시작되고 지속되기 마련이다. 그것은 한 번 사랑에 실패한 사람이 다시는 사랑을 하지 않겠다는 결심과는 상관없이 어느 날 처음인 듯 살포시 시작되는
요즘 포털 사이트나 주류 신문 뉴스, 방송을 접할 때마다 무서운 초딩이니 중딩이니 하는 단어들이 곧잘 등장하곤 한다. 학교, 학생, 청소년에 관한 뉴스치고 충격적이고 뒷맛 씁쓸한 것들이 대다수다. 올해도 그 어느 해 못지않게 구석구석에서 좋은 뉴스보다 좋지 않은 뉴스들을 더 많이 접한 것 같다. 우리 사회가 충격적인 뉴스에 더 방점을 두다 보니 오히려 수많은 따뜻한 작은 불빛들이 그대로 어둠속에 묻혀 버리고 만다. 학교폭력이니 교권 침해니 하는 뉴스들로 넘쳐나는 곳에 평범하고 당연한 이야기들은 비집고 들어 설 틈이 없는 현실이 서글프고 안타깝다. 그러나 우리 주변을 훈훈하게 달구는 이야기도 기실 많다. 밤하늘의 별처럼 많고 많은 아이들은 자신의 처한 상황에서 학업에 충실하고 따뜻한 마음을 나누며
계절이 깊어갈수록 햇빛이 다르고 물빛이 다르고 바람이 다르다. 몇일 전 소리 없이 다녀간 가을비 덕분일까. 한층 선명해진 풍경이 황홀하기 그지없다. 요즘 그 향연을 누리기엔 출퇴근길이 너무 짧아 맥없이 해안도로나 금강 변으로 돌아가기 일쑤이다. 가을이면 앓는 병이다. 가을에는 꼭 그렇다. 수년 전 대전으로 출퇴근하던 시절엔 너무나 힘들어서 경치고 뭐고 한참을 가다가 운전대를 놓아버리고 싶기도 했었다. 그런데 가을 눈요기 좀 더 하겠다는 욕심으로 이리저리 돌고 돌아가는 내 모습이 철딱서니 없기도 하다. 그러나 좋은 것은 언제나 오래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무엇보다 그 느낌 아니까 있을 때 더 붙들고 싶어지는 게다. 매일매일 가슴이 울렁거릴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축복인가. ‘느낌
요즘 퇴근하여 현관문을 열면 조용한 공간에서 맨 먼저 달려 나와 반겨주는 것이 있다. 잘 익은 탱자의 노란 향기다. 친정어머님이 동네 어귀에 아직도 버티고 있는 탱자 울타리 밑에서 주워 온 것들. 둥글둥글 탱자만의 끈적끈적한 피부결 탓에 먼지가 달라붙어 꼬질꼬질해진 몸을 일일이 수세미로 깨끗이 닦아서 한 바구니 가져다 놓으신 이후부터다. 팔순에 가까운 어머니 마음은 언제나 소녀에 머물러 있다. 밭농사 일로 바쁜 일손 중에도 봉숭아, 채송화, 백일홍, 꽈리, 맨드라미 등 철철이 꽃들을 심고 가꾸시며“저렇게 예쁘게 피었는데, 한번은 봐 줘야 하는 거 아니냐?”시며 함께 느끼고 탄성하길 원하신다. 매년 이 맘 때쯤이면 잘 익은 꽈리 열매들을 마늘, 양파 엮듯이 꼼꼼히도 엮어다 놓으시곤 한다. 그래서 가을이면
흐른다는 것 충남 서천 서면중학교 교장 신경희 이 세상에 흐르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강물이 흐르고 바람이 흐르고 구름도 흐른다. 시간이 흐르고 공간도 흐른다. 봄이 흐르고 여름이 흐르고 가을이 흐른다. 소리 내어 부르지 않아도 이른 새벽 강가 갈대가 바람을 불러오고 알록달록 고운 빛, 은빛 억새꽃, 시간이 그려놓은 가을 수채화 속에 그리움 한 자락도 걸려 있다. 한해가 이렇게 스멀스멀 잘도 흐른다. 깊어가는 가을이 매일 매일 가져다주는 것은 아름다운 변화다. 전봇대조차도 느낌표처럼 서 있는 계절.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판타레이(Panta rhei)’-모든 것은 흐른다. 흐르며 변화하는 자연에 절로 탄성이 흐른다. 안드레이스 드로스테크는 에서 ‘플라톤은
오래전 출장길 기차 안에서 책을 단숨에 읽어 낸 적이 있다. 고전이지만 쉽고 간결하게 정리된 이유에서였을 게다. 그리고는 책장 한쪽으로 밀쳐 두었었다. 그러다 어느 휴일 날에 여유를 부리며 한 장 한 장 음미하며 다시 읽다 보니 깊이와 맛이 새롭게 다가왔다. 그 후, 구기방심(求己放心)할 수 있는 벗으로 곁에 두고 있다. 지난 주말에 다시 펴서 쭈욱 넘기다가 ‘직업을 선택할 때 고려해야 할 것’ 이라는 글귀에 눈길이 멈췄다. 바로 맹자에 나오는 ‘시인함인(矢人函人)’ 항목이다. 활 만드는 사람과 방패를 만드는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직업 선택의 중요성을 전하고 있었다. 뭐 눈에는 뭐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요즘 자유학기제 연구학교 운영 등으로 꿈이니 진로니 직업이니 하는 단어들에 민감해져 있었던 탓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