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기온 33도 이상을 기록한 폭염일수가 십수일을 넘었습니다. 1994년 대폭염 때보다 더 하답니다. 입추가 지났는데도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사무실 밖으로 잠깐만 나가도 목젖까지 뜨거운 햇살이 들이쳐 금새 헉헉거리게 됩니다. 입추(立秋)는 가을 기운이 들어오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리는 절기입니다. 입추가 지났다고 해서 당장 가을이 오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현실은 한동안 오히려 그야말로 찜통 같은 더위가 절정을 이루게 됩니다. 아직 말복(末伏)도 보내지 않았으니까요. 그렇지만 입추(立秋)가 지났으니 맹렬한 이 무더위도 서서히 잦아들겠지요. 몇 일 전부터 아침저녁으로 미세하게나마 달라지지 않았냐고 주변사람들에게 묻고 또 묻습니다. 출근할 때 온도를 보면, 31도 이상이었는데, 28도,
7월의 중턱에 서니 절로 헉헉거려집니다. 장마 같지 않은 장마가 거치고 요즘 무더위가 엄습을 했습니다. 중천에는 용암이 이글거리고 시골 읍 전체가 찜질방입니다. 방송에서는 연일 기상캐스터들이 시간마다 폭염특보와 대응요령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제 갓 초복이 지났는데, 중복, 말복은 또 어떻게 지나가야 할지 벌써부터 큰 걱정이 앞섭니다. 사무실 안에서 물끄러미 창밖을 살피고 있습니다. 자주 빛 패추니아 꽃들이 기절한 듯 누워 있고, 나무들은 모든 고통을 무릅쓰는 수행자처럼 꼿꼿이 서 있습니다. 팔목의 시계는 오후 네 시를 넘어가는데 대지는 여전히 달아오르고 매미소리만 커지고 있습니다. 언 땅을 풀고 풀씨들이 고물고물 태어나기 시작해서 제비꽃이 오고, 민들레가 가고, 애기똥 풀 작은 목숨들을 지켜보며 생명이
올 봄엔 유난히 비가 잦았습니다. 해서인지 주변의 연두들이 초록 옷으로 갈아입는 시간도 앞당겨진 느낌입니다. 쑥쑥 자라난 후박 잎이며 감나무 잎에 비가 내리면, 파문처럼 레코드판처럼 회전하며 젖은 소리들이 들려옵니다. 그칠 줄 모르는 소리에 주변이 눅눅해지고 나도 이유 달지 않고 함께 젖습니다. 침묵하고 서 있는 젖은 초록들의 무게로 어깨가 무거운 날이면, 그리움이 도진 참죽나무 숲처럼 마음도 아파옵니다. 이슬을 털며 산길을 내려오는 여승의 설움에 진 머루 빛 눈동자, 창백한 얼굴처럼 너무 애지고 막막해집니다. 바쁘게 돌아가던 물레방아가 멈춰진 듯 갑작스레 여유로운 시간이 생기는 날이면 더욱 그렇습니다. 인간사 원래 그런 것인지 늘 부산합니다. 내 마음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누군가 바쁜
모든 것들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판단해야 하는 새 자리에서 새봄이 몹시 바빴습니다. 산수유와 진달래가 오고, 벚꽃이 지나가는 햇빛 좋은 어느 날. 봄바람에 곰살가운 시인의 한권이 홀연히 날아들었습니다. 순간 시인의 마음에 울컥하고는 바쁘다는 핑계로 사무실 책상에 그대로 눕혀 놓았습니다. 새 터에서 한동안 글쓰기는커녕 시(詩)한 수 읽질 못했습니다. 지난 주 바쁜 시간을 갈라 숨을 크게 내쉬며 창밖을 한참동안 바라보았습니다. 청사 내 덩그레 서 있는 목련은 우유 빛깔 꽃을 내려놓은 지 오래 이고, 한 잎 한 잎 순한 아기 잎새를 틔우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4월도 중순 능선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밤은 짧아지고 낮은 꽤나 길어졌습니다. 마치 함박눈이 내리 듯 벚꽃이 눈처럼
아직도 지난해 삶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어정쩡하기만 한데, 무술년 새해가 밝은지 일주일여가 지났습니다. 벽두부터 곳곳에서 벌어진 사건사고들을 접하면서 지금 이 순간 살아있다는 것이 기적이니, 무술년 새해 출발부터 기적인 셈입니다. 나이 한 살을 더 먹었습니다.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는 않은데, 어깨가 무겁고 더부룩합니다. 새해맞이 타종식을 시청하며 “보기 좋게 나이 들어가야지” “잘 늙어야지” 그런 다짐을 했습니다. 지난 연말에 ‘잘 늙은 집’을 보고 왔습니다. 우연히 모 방송사의 을 시청하다가 알게 된 곳입니다. 현대 문명의 헛바람을 맞지 않고, 오랜 세월 곱게 늙어 온 절입니다. 큰 사찰도 아니고 화려한 곳도 아닌 안도현 시인이 숨겨 놓은 절, 완주 ‘화암사’가 그 곳입니
12월 허리에 서니 숨이 찹니다. 흰 머리카락이 더 많이 섞이고 많이 낡아진 마음으로 그래도 여기까지 무사히 걸어왔습니다. 휴일 오후, 느긋하니 창가에 앉았습니다. 또박또박 품고 온 발자국의 무게를 풀어놓습니다. 지난 오월, 종달새 소리 품은 노란 빛 도는 새순으로 만든 감잎차. 그득한 찻잔으로 실처럼 가늘어진 겨울햇살이 살포시 내려앉았습니다. 따끈한 차 한 잔에 지나 온 날들이 다 꺼내질 것 같습니다 커피처럼 유혹적이고 매력적이지는 않습니다. 풋 비린내 나는 밋밋한 차 맛이지만 내게는 상처를 거르는 거름망이고, 토닥토닥 위안의 향기랍니다. 누가 오기로 한 것도 아니면서 누굴 기다리는 사람처럼 창밖을 자주 바라보며 한 모금씩 마십니다. 마음이 꽃으로 피는 맑은 물소리, 정신이 맑아집니다. 질
12월이야, 누군가 귓가에 가만히 속삭입니다. 12월은 누구에게나 생각이 많아지는 달이지요. 터번만 두르지 않았을 뿐, 인도에서 가져온 오래된 침묵을 사용하게 됩니다. 벌써, 산과 들녘은 숨 고르기에 들어갔습니다. 우리 집 쪽 마당에서 산수유 노란꽃등 올리던 그 날을 건너, 뜨거웠던 여름, 황금 빛 가을을 지나서 어느새 여기까지 왔습니다. ‘오늘 슬픔의 미결수가 되어 또 한 계절을 떠나보낸다’던 싯귀가 어른거립니다. 놓친 기억들에 이끼가 끼어있지만, 대자연의 큰 품에서 올 한해도 건강히 왔음에 감사드리는 시간입니다. 잡초처럼 돋아나는 욕심은 여전한데, 저만치 개평으로 얻은 나이가 제법 수북합니다. 오십 넘어 노안이 찾아오고, 멀리도 가까이도 볼 수 없는 지점에 눈 감으면 선명해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올해도 달랑 한 달밖에 남질 않았군요.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가늠치 못한 채 정신없이 살고 있습니다. 무에 그리 바쁘다는 건지. 톱니바퀴에 끼어 마구 돌아가는 느낌입니다. 이것저것 신경 쓸 것 많은 일상과 사람에 치여 힘이 빠져 있습니다. 알록달록한 간판처럼 산만하고, 마음이 쇼윈도 불빛처럼 산란합니다. 이런 삶에서 조금만이라도 비켜서고 싶어 불현 듯 신간을 주문했습니다. 줄리 포인터 애덤스의 가 그것입니다. ‘와비사비’란 일본어 ‘와비’와 ‘사비’가 합쳐진 말이라는군요. ‘와비(わび)’는 단순한 것, 덜 완벽한 것, 본질적인 것을 의미하고, ‘사비(さび)’는 시간의 흐름을 받아들인 오래된 것, 낡은 것을 뜻합니다. 눈이 뻑뻑하고 시려올 때마다 따뜻한 차 한 잔과 함께 짬을 내
시월이 갔습니다. 80년대 유행가 ‘잊혀진 계절’은 10월의 마지막 밤에 애절한 의미를 부여하며 삼십여 년 동안 가슴 속을 잔잔히 흘렀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잊혀진 계절은 망망 가슴 속으로 흘러갔습니다. 11월도 또 그렇게 달려가겠지요. 달력에는 주말마다 행사가 줄줄이 걸려있어 늦가을 정취를 만끽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 명약관화하거늘. 허망이 가버린 시월이 아쉬워 11월 첫날, 늦은 오후를 뚝 잘라 의기투합했습니다. 그리고는 무작정 만추(晩秋)바람 손잡아 떠났습니다. 출장 나간 팀원들은 어찌할 수 없었지요. 사무실에 콕 박혀있던
서리 내리고 국화주와 국화전을 먹는다는 가을의 마지막 절기인 상강(霜降)이 지났습니다. 구절초, 노랑 산국 향기 속으로 가을이 깊어갑니다. 하늘은 푸르고 높고, 소슬바람 따라 마음도 덩달아 출렁입니다. 단풍이 짙어지면서 그리움은 그 두께를 더해갑니다. ‘눈멀면 아름답지 않은 것 없고, 귀 먹으면 황홀치 않은 소리 있으랴. 마음 버리면 모든 것이 가득하니 눈물겨운 마음자리도 스스로 빛이 나네.’ 어느 해 가을인가, 의미 깊게 젖어들었던 싯구(詩句)가 떠오릅니다. 남부러울 것 없이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도 남모르는 허전한 가슴을 끌어안고 삽니다. 사람은 불완전한 존재이고, 삶은 아이러니의 연속이기 때문이지요.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것’이라던 어느 유행가 가사에 백번 공감하면서도
열흘간의 긴 추석 연휴가 끝이 났습니다. 사람들은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 명절을 보냈을까요. 해외여행을 떠나거나 전국 관광지를 찾거나, 도심지역에 마련된 각종 행사에 참여하는 등 다양한 연휴 풍경이 연출되었겠지요. 평생 다시 만날 수 없는 이른바 다이아몬드 추석 연휴 풍경을 ‘다시보기’ 해봅니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출근준비를 하며 정신없이 돌아가던 시간이 멈춰버린 듯 잠시 삶이 뒤뚱거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긴 휴일동안 몸의 에너지 센터들이 깨어나고, 우주의 중심에서 무한 회전하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잠깐 숨을 돌려 그간 미뤄 뒀던 옷장이며 집안 정리에 인심 쓰듯 시간을 듬뿍 내줄 수도 있었습니다. 황금 같은 시간들을 집안에만 가둬둘 수 없어 무작정 떠났습니다. 영광 백수해안도로를 따라 불갑사로
푹푹 찌던 불볕더위와 폭우가 저만치 물러가고, 청명한 하늘이 우리를 기분 좋게 맞이합니다. 밤 기온이 '이슬점' 이하로 내려가면서 풀잎에 이슬이 맺히는 데에서 유래했다는 백로를 지났으니 흰 이슬 맺으며 가을이 깊어가겠지요. 톨톨한 가을볕에 더덕 꽃은 울타리에 종소리로 매달려 있고, 백일홍은 씨방을 키우고, 기다란 대궁에 늦 옥수수수염이 말라갑니다. 여기저기 여물어가는 소리들을 만날 수 있는 시간입니다. 지난 일요일엔 새벽 출근 걱정 없이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니 세상이 너무나 밝고 환한 겁니다. 까슬까슬한 바람과 파란 하늘에 부서지는 햇살이 얼마나 눈부시던지. 미당 서정주 시인의 시(詩)가 송창식의 노래 가락으로 들려왔습니다.
8월 초에 사나흘 휴가를 내서 맛있게 쉬었습니다. 짧았지만 낯선 곳의 바람을 쏘이고, 오랜만에 두툼한 소설책도 읽어냈습니다. 그런데, 입술이 부르트고 오히려 비실비실하니 참으로 어이가 없습니다. 퇴적한 생각들을 발라내는 나른한 혼곤 상태로 맘껏 편히 늘어져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나이가 들면 쉬는 일도 힘이 드는 건가 봅니다. 장마 끝나고 찜통더위가 이어지더니 아침저녁 새로 조금 나아지는가 싶습니다. 다음 주가 처서(處暑)이니 햇볕은 따갑지 않고, 풀은 더 이상 자라나지 않겠지요. 단독주택에 살다보니 하루가 멀다 하고 사정없이 자라나는 풀들과의 전쟁이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달콤한 쉼을 뒤로 하고 일상으로 돌아오니 할 일은 많은데, 맘같이 되지는 않습니다, 이래저래 스트레스가 쌓이는 날이 많습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쉰 새벽에 깨어 블라인드 틈을 손가락으로 열었습니다. 일어나자마자 바깥 풍경을 살피는 것은 오래된 습관입니다.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밤안개의 꼬리가 금강 하류 쪽으로 방향을 트는 게 보였습니다. 햇볕이 뜨겁고 무척 더우려나 봅니다. 안개 낀 날은 늘상 그랬으니까요. 삶이 통근생활이다 보니 누구보다도 날씨에 민감합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 뉴스나 인터넷으로 ‘내일의 날씨’를 확인하곤 하지요. 안개가 자욱하던 날, 예상과는 달리 하늘이 내내 잿빛이더니 장맛비가 내렸습니다. 이 쪽 저쪽으로 왔다 갔다 하며 게릴라성으로 뿌리는 장맛비. 이 지루한 우기(雨期)가 견디기 힘듭니다. 그런데, 이런 나날도 곧 끝나겠지요. 그렇다고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불볕더위가 견디기 쉬운 건 아닙니다. 눅눅하고
7월은 치자꽃 향기를 들고 온다고 했던가요. 하얗게 피었다가 질 때는 고요히 노란 빛으로 떨어지는 꽃처럼 칠월이 그렇게 가고 있습니다. 오지 않을 것만 같던 장마가 찾아들었고, 가뭄은 해소되었습니다. 뜻밖에 일부 지역에서는 기록적인 물 폭탄이 터져 인명 피해는 물론, 침수 피해가 막심하기도 했습니다. 뜻하지 않은 자연재해는 언제나 두렵습니다. 후텁지근한 장마가 계속되면서 일상이 짜증스러워졌습니다. 매년 이 맘 때쯤이면 몸도 마음도 지쳐 있습니다. 별거 아닌 것에 불쑥 얼굴이 달아오르는가 하면, 불쾌지수 온도계가 한 없이 치솟기도 합니다. 조심하지 않으면 한순간 폭발할 수도 있지요. 그래서 내 자신이 무서워지기까지 하는 때입니다. 거기다가, 둘러봐도 누구 하나 버팀목이 돼 줄 사람은 없는 듯 느껴지
가뭄에다 때 이른 무더위로 농작물은 물론이고, 온 세상이 지쳐 있습니다. 소나기가 몇 차례 다녀갔지만 갈증은 여전합니다. 태양은 무신경한 듯 뜨겁게 타오릅니다. 연 초부터 달려 온 몸과 마음이 지쳐 있습니다. 그럼에도 일은 끊임없이 밀려듭니다. 눈앞엔 책임이란 놈이 큰 바위 덩이로 버티고 서 있으니 난감합니다. 반년을 쉼 없이 달려왔건만, 결과는 어쩌면 이리 보잘 것 없는지요. 두려움은 마음을 오그라뜨리고 선택과 집중 앞에서 서성거릴 때마다 얼굴은 점점 붉게 부풀어 오릅니다. 요즈음은 저 지대의 맨홀이라도 된 듯, 온갖 나쁜 상황들이 빗물처럼 몰려드는 그런 기분입니다. 새벽부터 서둘러 걷고 뛰어야 열심히 사는 거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거리의 철학자 에릭 호퍼는 말합니다. “서두른다는 느낌은 보통
기화요초가 만발하고 녹색의 향연이 무르익어가는 계절입니다. 찬란한 산하를 바라보며 생명의 신비로움과 존귀함을 노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늘, 땅 어느 곳 하나 싱그럽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슬픔이나 고독이 끼어들 자리도 이미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도 이상스레 차분한 적멸 같은 것이 마음에 공(空)으로 번져오는 날이 있습니다. 무엇도 기다리지 않고, 설렘도 울렁증도 없이 멍하니 보내는 날. 그런 날엔 일상적인 삶이 궤도를 이탈합니다. 거기엔 날씨도 단단히 한 몫 거듭니다. 황사 비가 내린다던지, 한여름을 방불케 하는 이상 기온이나 미세먼지로 가득 메워진 잿빛 하늘이 온 세상을 덮을 때면, 괜스레 우울하고 몸까지 무거워집니다. 일이고 뭐고 그냥 다 팽개치고 어디론가 달아나 숨어버리고 싶은 날입니다.
다시 봄이 왔습니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 가는 끊임없는 시작이다’라던 신영복 선생님 말씀처럼 봄은 분명 또 다른 시작이지요. 봄 햇살이 바람 손잡고 소풍 나와 허겁지겁 헛배만 부른 삶을 어루만져 줍니다. 그늘진 허기가 가십니다. 지난 주 휴일엔 손바닥 만한 마당 한켠에 쭈그려 앉아 어느새 자란 쑥을 한 소쿠리 캤습니다. 몸은 쭈그려 앉았는데, 마음은 어찌 그리도 편안하고 평화롭던지요. 잊혀 져도 변함없이 같은 자리에서 싹을 올리는 그들처럼 그렇게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요즘은 제철 음식이 따로 없다지만 봄에는 아무래도 봄나물이 제격이지요. 이맘때면 얼음이 박힌 흙살을 헤치고 제 힘으로 일어선 노지 쑥으로 된장국을 끓여 봄을 마십니다. 쑥 부침이나 튀김은 더 별미랍니다. 아무리
입춘 다음 날 비가 내렸다. 그러니까 분명 봄비였다. 그런데, 엊그제부터 일기예보는 다시 강추위가 온다고 들썩인다. 우리 집 쪽 마당에 청매화가지마다 꽃봉오리들이 봉긋봉긋한데 다치지 않을까 걱정이다. 일주일에 두어 번 받는 편지가 있다. 의회사무실에서 일하는 젊은 여 주무관이 ‘지역 주요 여론동향’ 이란 자료와 함께 업무메일로 짤막하게 보내주는 글이다. 일에 치여 마음의 여유조차 못 잡고 있을 때, 잠시나마 숨을 고르며 생각할 시간을 쥐어주는 고마운 편지다. 나는 어쩌다 한 번 회신을 할 뿐이다. 자신의 업무와 연계해 누군가에게 숨통을 열어주는 그녀만의 배려와 편지를 쓰는 그 마음이 참 아름답다. 얼마 전에 영화 에 나오는 대사를 인용한 편지를 받았다.
2016년 원숭이해가 저물고 있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올해도 다사다난했다. 어김없이 서해안고속도로를 달렸고, 타인의 평가에 매달리느라 일에 쫓겼다.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이나 마음 재테크는 엄두도 내질 못했다. 돌아보면 특별하다 할 것은 없다. 열두 달을 살아오면서 가족 모두 크게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여기까지 온 것에 그저 고맙고 감사하다. 그나마 때로 가슴 뻐근함을 안겨준 것은 글줄이나 쓴다면서 시간을 토닥거릴 때였던 것 같다. 사소한 일도 대단한 일이 됐다. 작은 사건도 전설이 되고, 어려운 일도 아름다움으로 승화되는 시간이었다. 근자에 제주 출장이 몇 번 있었다. 언제나 1박 2일이라서 오가는 시간, 공항에서 기다리는 시간을 생각하면 별거 아니다. 하지만 사무실이 아닌 곳으로 떠난다는 사실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