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안분지족(安分知足)’이란 말이 있습니다. 분수를 지키며 만족을 안다는 의미입니다. 또 그런 사람들이 사는 마을을 지족실, 지족동이라 칭했습니다. 유성에도 그런 지족동이 있습니다.

지족동에는 큰 산과 밭이 있었고, 그 산 아래 마을에는 끼니조차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가난한 집이 있었습니다. 마침 아이가 있었는데, 아이는 배고픔에 시달리다가 신탄진의 어느 부잣집으로 머슴살이를 가게 되었습니다. 아이는 하루 세끼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지만, 지족실에 사시는 부모님은 여전히 굶주리고 계셨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아이는 주인집에서 먹으라고 과일이나 떡을 주면 먹지 않고 보관했다가 밤마다 지속실에 계신 부모님께 갖다 드렸습니다. 아이는 이렇게 부모님을 봉양하며 살았고, 나이가 들어 이제 총각이 되었습니다. 의젓한 총각이 되었어도 여전히 밤마다 부모님 봉양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밤 역시 지족실에 계신 부모님께 음식을 싸들고 가려고 나서는데 마음씨 착한 주인집 아가씨가 길을 막아서더니 총각의 봇짐에 옷감을 넣어 주었습니다. 부모님 갖다드리라는 아가씨의 선물이었습니다. 총각이 머뭇거리며 눈치를 보자 아가씨는 “늦게 떠나면 새벽에 못 돌아올 것 아니오. 부모가 중요하오? 눈치가 중요하오?”라고 하며 길을 재촉하였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말없는 수많은 사연이 순간 스치었습니다만, 총각은 떨리는 가슴을 부여안고 지족실 부모님 댁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날 이후 주인집 아가씨는 한양으로 시집을 갔습니다. 한양으로 떠나던 날 아가씨는 머슴총각을 보고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길을 갔습니다. 총각은 아가씨 눈물의 의미를 알았지만, 머슴 신분이었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총각은 아가씨가 떠나자 무슨 일을 해도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멀리 아가씨가 떠난 길만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 있었습니다. 결국 총각은 주인집에 양해를 구하고 지족실 집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집에서도 그 어떤 일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대신 매일 같이 뒷산으로 올라가 저 멀리 아가씨가 살던 신탄진을 바라보았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이런 생활을 하다가 결국 총각은 병들어 죽고 말았습니다.

총각이 매일 같이 신탄진을 바라보던 그 산봉우리에 바위가 생기고 벚나무가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바위와 벚나무는 총각의 화신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신탄진에서 이 바위와 벚나무가 보이는 날에는 신탄진에 사는 처녀가 미치지 않으면 죽는다는 이야기가 떠돌았고,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이 바위와 나무에서 제사를 지냈답니다. 그 때부터 신탄진에 화가 없어졌다고 합니다.

(글= 한국효문화진흥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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