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호스피치리더십연구소 대표 이창호

지금은 글로벌 시대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인류는 더 나은 미래를 창조할 영웅을 찾고 있다. 인류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할 미래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것이다. 나아가 개인의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글로벌 미래의 희망을 꿈꾸며 내 안에 잠자는 거인을 깨우는 것이다.

삼문현은 중국 절강성(浙江省, 저장성)의 성도인 절강성 동부에 위치하며 동쪽으로 동중국해와 접한다. 북쪽으로 닝보, 북동쪽으로 사오싱, 서쪽으로 진화, 남서쪽으로 리수이, 남쪽으로 원저우시에 접한다. 서한의 시원 2년(BC 85년)에 회포현이 설치된 이후, 당나라 무덕 4년(621년)에 해주(海州)로 변경되었고, 다음 해에 타이저우(台州)라고 개칭되었다. 1994년에 타이저우시가 설립되어 삼문현은 현급 행정구역이 되었다.

최부는 1454년에 전라도 나주에서 아버지 진사 최택과 어머니 해남 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점필재 김종직을 찾아가 사사하였다. 1477년에 생원 시험을 3등으로, 진사 시험을 59등으로 입격한 이후, 문과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성균관에 입학하게 됐다. 그는 1482년 치러진 알성시에서 문과 을과 1등(전체 3등)으로 급제하여 관직에 나섰다.

1488년 제주도에 추쇄 경차관(도망간 노비를 찾아 체포하는 벼슬)으로 파견되어 임무를 수행하던 중, 그해 윤 정월 3일. 최부는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였다. 배를 타고 강진 지역으로 가던 길에 풍랑을 만나 배가 지금의 절강성 삼문현 연안에서 표류하게 된다.

표류했던 그와 일행 42명은 다행히 삼문현 육지에 무사히 도착하여 중국 관리들의 호송을 받아 북경으로 가서 황제 효종을 만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두 번이나 해적을 만났으며, 육지에 올라서는 왜구로 오해받기도 했다.

이후, 최부가 조선 관리임을 알게 된 삼문현 현지인에 의해 운하와 육로를 이용해 명나라 수도인 북경까지 호송을 받아 당시 황제 효종을 알현한 뒤, 요동반도를 거쳐 약 6개월 만에 압록강을 거쳐 조선으로 돌아온다. 효종의 명에 따라, 단 한 명의 희생이나 낙오자 없이 송환길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최부는 이 기간 상복을 고집하여 부친에 대한 예를 다했다고 한다.

최부는 귀국 이후, 성종의 명령으로 1488년 1월부터 7월까지, 즉 표류에서 귀국까지의 과정을 《표해록》이라는 책으로 남기게 된다. 최부의 《표해록》은 매우 중요한 저작물로, 지금까지도 15세기 후반 중국 동부 연안 지역의 자세하고 정밀한 기록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책은 이후 중국과 일본에도 알려져 그의 이름을 국제적으로 알리게 되는 대표적 저술이 됐다.

최부는 사림파 정치인이자 관료로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을 자처한 인물이나, 동시에 훈구파의 대표 격인 사가정 서거정(徐居正)과도 깊이 교류했다. 최부의 문집인 《금남선생집》이나 《표해록》을 간행하는 등 그와 관련된 각종 기념 활동을 이어갔다.

세계 3대 중국 기행문에 꼽히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이어 《표해록》은 이미 많은 번역본이 나와 있다. 최부의 눈에 비친 항주는 금은이 쌓여 있고 사람들은 비단옷을 입었으며 사계절 시들지 않는 꽃이 피어 항상 봄과 같은 곳이었다. 그는 중국 남과 북의 가공 물자가 오고 갔던 대운하에 대한 기록을 상세히 기록하기도 했다.

그는 물길을 거쳐 무사히 북경까지 다다른 뒤에, 대운하 이용의 편리함을 다음과 같이 썼다. “이 강의 수로가 아니었다면 기구한 만 리 길에 온갖 고통을 겪었을 것인데 지금 배 가운데 편안히 누워서 먼 길을 오며 전복의 근심을 알지 못했다.”

한편 대한민국 무안군은 지난 1998년부터 중국 태주시와 교류를 시작한 이후, 행정부·의회·청년단체·문화예술단체·기업체 대표 등으로 구성된 대표단을 통해 최부 선생의 묘와 회산 백련지, 초의 선사 탄생 유적지를 연계한 관광코스의 개발을 위해 수차례에 걸친 상호 교환 방문을 진행했고 우호와 친선의 관계를 발전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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