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대전투데이 대전=송병배기자]충남동부보훈지청은 3․1절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해 만세운동 알리기 네번째로 천안시를 지정했다고 21일 밝혔다.

□ 목천면(木川面) 보통학교 학생 의거
3월 14일 하오 4시경 목천보통학교 학생 약 120명이 교정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이 외치고 근처를 누비고 다니며 시위했다. 이로 인해 주동인물 4명이 체포됐다.

□ 입장면(笠場面) 양대(良垈)·입장(笠場)시장
3월 20일 10시 경 광명학교(光明學校)[월리암 경영의 미국 미션사립여숙(女塾)]의 교사와 학생 수십명이 직산금광(稷山金鑛)의 광부 및 부근 주민 약 70명과 함께 양대리 시장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절규했다.

이들은 다시 하장리(下場里) 소재 입장시장(笠場市場)으로 향해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이 외치며 일대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도중에 급보를 접하고 출동한 천안헌병대와 일대 충돌을 빚어 남자 40명과 여자 10명이 체포됐으나, 일부는 입장시장에 이르러 약 7백명의 군중이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절규하며 일대 시위를 벌였다.

3월 25일 직산금광회사의 고용인 박창신(朴昌信)이 동료 안은(安銀)·한근수(韓根守) 등과 27일 박창신 집에서 태극기 다수를 만들고 백학서(白學西)를 동지로 참가시켜 28일 입장시장에서 거사할 것을 약속했다.

그리하여 28일 아침 6시 30분경 갱부(坑夫) 교체시간에 갱부들에게 독립시위운동 전개를 권유해 그 자리에서 200여 명이 대한독립만세시위를 벌이며 입장시장으로 향했다.

아침 7시 반경 이를 저지하는 일제 헌병과 충돌하면서 양대 헌병주재소를 습격하고 헌병의 무기를 빼앗으려 하고 전화줄도 절단했다. 그 결과 8명이 체포되고 6명이 부상당했는데, 그 중 2명은 아깝게도 절명했다.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박창신은 1년 6월, 안은·한근수는 각 1년, 백학서는 10월의 형을 언도받고 불복 공소했으나 6월 25일 기각됐고 다시 상고했으나 9월 4일 기각됐다.

3월 30일 입장에서는 약 3백명의 군중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를 전개하다 출동한 일제의 구원병에게 6명이 검거됐다.

□ 천안면(天安面)
3월 29일 천안 읍내에서 약 3천명의 군중이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일대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이에 대해 적의 천안헌병분대가 수비대와 합세해 발포했고, 이로 인해 26명이 검거됐다.

이날 현장에서 주동인물 이문현(李文鉉)·허병(許柄)·최오득(崔五得)·인시봉(印時鳳) 등이 체포됐고, 4월 18일 공주지방법원의 초심을 거쳐 5월 1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각 1년 6월의 형을 선고받았다.

□ 풍세면(豊歲面)의 횃불시위
3월 30일 풍서리(豊西里)를 중심으로 주변의 산 20여 개소에서 수백 명의 군중이 횃불을 올리고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했는데, 그 중 약 2백명이 만세를 절규하며 풍서리 시장으로 시위행진을 계속했다. 이에 대해 일제는 발포로 응수했다.

□ 성환면(成歡面)
3월 31일 밤 수천명의 군중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전개했다. 이에 크게 놀란 일제 경찰과 헌병이 총칼로 제지하고 나섰다.

□ 갈전면(葛田面) 병천(並川)시장
수신면․성남면민계 주민들과 동면민계 주민들은 4월 1일에 병천시장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계획했다.

수신면(修身面)·성남면(城南面)민계는 홍일선(洪鎰善)·김교선(金敎善)·한동규(韓東奎)·이순구(李旬求)·이백하(李伯夏)·김상철(金相喆) 등 20대 청년들로, 동면(東面)민계는 조인원(趙仁元)·조인원 아들 조병호(趙炳鎬)·유관순 아버지 유중권(柳重權)·유관순 숙부 유중무(柳重武)·조만형(趙萬衡)·김상훈(金相訓)·김용이(金用伊)·박제석(朴濟奭)·박봉래(朴鳳來) 등으로 구성됐다.

수신면․성남면민계 김교선은 홍일선(洪鎰善)의 발의로 갈전면 병천(並川)시장의 장날에 거사키로 해 3월 29일경 한동규·이순구에게 그 뜻을 고해 호응을 받고, 한동규는 다시 이백하의 찬동을 받았다.

4월 1일 김교선·한동규·이백한·이순구는 홍일선과 함께 병천시장에 이르러 각자 시장의 출입구에서 지나가는 사람에 대해 만세 부를 것을 권했고, 김상철은 조인원(趙仁元) 등이 따로 기획한 운동에 합류해 만세를 부르면서 시장을 누비고 다녔다.

이에 일제 헌병의 발포로 즉사자가 발생하자 김교선·이백하·이순구 등은 약 1백명의 집단을 지휘하고 주재소에 쇄도했고, 김교선은 솔선해 사무실 입구에 서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군중과 함께 만세를 절규했다. 또한 한동규는 헌병보조원이 강탈했던 태극기를 빼앗아 흔들며 이백하와 함께 주재소장에게 “죽은 사람은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도 죽여라.” 하며 대들고, 이백하는 유치장의 구금자를 석방할 것을 요청하고, 이순구는 갈구리로 유치장벽을 털어 구멍을 내고, 김상철은 유치장벽을 서너 번 발로 찼다.

그 결과 김교선(金敎善)·한동규(韓東奎)·이백하(李伯夏)·이순구(李旬求)에게는 각 2년, 김상철(金相喆)에게는 6월형이 선고됐다.

동면민계 유중권의 딸 유관순은 서울 이화학당(梨花學堂)에 재학하던 중 16세의 나이로 3월 5일의 남대문 운동에 참가했다가 독립선언서를 몰래 가지고 내려와 조인원(감리교 동면 속회장), 아버지 유중권, 숙부 유중무 등에게 보이고 서울의 정경을 자세히 보고했다.

병천시장은 멀리는 충북의 청주(淸州)·진천(鎭川), 가까이는 천안군(天安郡) 내 각면으로부터 온 장꾼이 모이는 곳이므로 천안 길목은 조병호(趙炳鎬), 수신면(修身面) 쪽은 조만형(趙萬衡), 진천(鎭川) 쪽은 박봉래(朴鳳來)에게 연락을 맡기고 밤에는 조인원이 속회장을 맡고 유중무가 교사직을 맡고 있는 예배당에서 태극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3월 31일 밤 자정에 병천시장을 중심으로 천안 길목 목천넘어고개, 수신면 산마루, 진천고개마루에 다음날의 거사를 알리는 횃불을 놓고 다음 날 아침 병천시장에 몰려갔다.

4월 1일 하오 1시경 태극기와 ‘대한독립’이 새겨진 큰 깃발을 세우고 조인원이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군중이 이에 화창하며 만세를 소리 높이 불러 시장 안은 삽시간에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 그 동안 군중에게 태극기가 배부되고, 군중은 열을 지어 큰 깃발을 선두로 시장을 누비고 다녔다. 이때 일본 헌병들이 기총(機銃)을 난사해 사망자 19명과 부상자 30명 이상이 발생했다.

하오 4시경 시장에서 헌병에게 총검으로 좌복부(左腹部)와 머리를 찔려 빈사상태에 빠진 유중권을 아우 유중무가 업고 김용이·조인원·조병호·유관순 등이 뒤따라 약 40명이 주재소에 몰려가 유중무는 두루마기 끈을 풀어 제치고 적 헌병에게 큰 소리로 항의하고, 조인원도 저고리를 벗어 버리고 주재소장(小山)과 헌병 상등병[湊谷]의 총부리를 잡아 제쳤다.

이때 주재소의 헌병들은 잔뜩 겁에 질려 입구의 왼쪽 벽에 기대어 줄지어 서 있었는데, 유관순도 “우리는 나라를 찾기 위해 정당한 일을 하고 있는데 왜 무기를 사용해 우리 민족을 죽이느냐?”고 외쳐 헌병이 총뿌리를 들이대자 “죽이려면 죽여 보라.”고 하며 주재소장을 쿡쿡 찔러 혼을 냈으며, 조병호는 헌병 상등병의 따귀를 후려갈겼다.

그러자 군중들은 겁에 질린 헌병들의 총부리에 달라붙고 탄약갑을 잡아당기고 해 격투가 벌어졌는데, 헌병들의 야만적인 발포로 조인원은 가슴에 총을 맞고 왼쪽 팔을 칼로 찔리는 등 부상을 입었으며, 결국 다수의 사상자와 피체자가 발생한 채 군중이 후퇴했다.

후퇴한 군중은 천안·병천간의 전화줄을 절단하고 전주 1개도 쓰러뜨렸으며, 갈전면 사무소와 우편소를 습격하고, 부근의 산 위와 시장에서 사태의 진전을 주시했다. 또한 경비하던 일제 헌병 1명을 일시 납치하기도 했다.

일제는 흩어지는 군중에게도 등 뒤에서 발포하고 총검으로 마구 찔러 그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에 김구응(金球鷹)이 항의하다 총에 맞고 쓰러지자 일제는 야만무도하게도 그의 두개골을 박살내고, 비보를 듣고 달려온 그 모친 채씨(蔡氏)가 아들의 시체를 안고 통곡하자 그 노모마저 창과 칼로 찔러 죽였다.

일제는 이 같은 만행을 감행하고도 이날 늦게 수십명을 체포했는데, 이들은 연행되어 말할 수 없는 고문을 받았다. 그중 조인원·조병호 부자, 유중무·유관순 숙질이 포함되어 있었다.

유관순은 이날 부모를 잃고 본인도 옥고를 겪게됐으며 후일 공주 감옥에서 만세운동으로 잡혀온 오빠 유우석(柳愚錫)을 만나게 됐으니 그 심정이 어떠하겠으며, 옥중에서도 어윤희(魚允嬉)·박인덕(朴仁德) 등과 함께 만세를 계속 부르다 끝내 1920년 17세의 꽃다운 나이에 서대문 감옥에서 장독(杖毒)으로 옥사했으니 커다란 민족한(民族恨)이 아닐 수 없다.

그녀의 유언은 “일본은 망한다. 절대로 망하고야 만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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