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호스피치리더십연구소 대표 이창호

한산(閑山)섬 달 밝은 밤에

수루(戍樓)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一聲胡茄)는 남의 애를 끓나니.

-이순신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적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수루에 앉아 조국을 걱정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피리 소리가 장군의 마음을 더 애끓게 만드는 모습이 그려진다. 나라를 정말로 걱정하고 위하는 이순신의 마음이 전해진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당시, 제2차로 출동한 5월 29일부터 6월 10일까지 사천선창(泗川船艙)·당포(唐浦)·당항포(唐項浦)·율포해전(栗浦海戰) 등에서 이순신의 수군은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육지에서는 계속 패전의 소식만이 들려왔다.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한산도대첩은 1592년 7월 6일 벌어진다. 퇴각하는 5~6대의 조선 전선을 추격하던 일본 전선은 도리어 조선 전선에게 포위당하고, 결국 59척이 분멸되면서 조선군은 대승을 거두게 된다. 적선을 포위하는 학익진으로 대승을 거둔 것이 바로 한산도대첩이다.



조선 수군은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전선 48척을 이끌어 노량에 이르렀고, 경상우수사 원균이 7척의 배를 이끌고 합류했다. 7일 저녁 조선 함대가 고성(固城) 당포에 이르렀을 때, 적함 대·중·소 70여 척이 견내량(見乃梁)에 들어갔다는 경상도 목자(牧者: 말 먹이는 사람) 김천손(金天孫)이 달려와서 정보를 접하고 이튿날 전략상 유리한 한산도 앞바다로 적을 유인할 작전을 세웠다.



그리하여 먼저 판옥선으로 일본의 함대를 유인하여 한산도 앞바다로 이끌어 내고, 급히 뱃머리를 돌려 학익진을 치고 각종 총통을 발사해 적선 2~3척을 쳐부수었다. 이에 당황하여 도망가는 일본군을 맹렬히 공격하여, 47척을 쳐부수고 12척을 나포했으며 무수한 적을 섬멸했다.



한산도는 거제도와 고성 사이에 있어 사방으로 헤엄쳐 나갈 길도 없고, 적이 궁지에 몰려 상륙한다 해도 굶어 죽기에 적정한 곳이었다. 이리하여 아군은 예정대로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자 미리 약속한 신호에 따라 모든 배가 일시에 북을 울리며 뱃길을 돌리고, 호각을 불면서 학익진(鶴翼陣)을 펴고 일제히 왜군을 향하여 진격했다.



인류 최초 신출귀몰(神出鬼沒)의 철갑선이라는 거북선의 지자총통(地字銃筒)·현자총통(玄字銃筒)·승자총통(勝字銃筒) 등 모든 화력을 한꺼번에 쏘아 왜군을 격파하고 불사른 것만도 66척이나 되었다.

또한편으로 왜군의 목을 잘라 온 것이 86급(級), 기타 물에 빠지거나 찔려죽은 수가 수백 명에 이르렀으며, 한산도로 도망친 400여 명은 군량이 없이 13일간을 굶주리다가 겨우 탈출하였다. 이 싸움은 임진왜란 때의 3대첩(大捷)의 하나로, 그 결과 왜군은 전멸하였고, 이순신은 그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억기와 원균은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서(陞敍)됐다.



한편 제승당은 바로, 이순신(李舜臣)의 사령부가 있던 곳이다. 이곳을 본거지로 삼아 당포승첩(唐浦勝捷) 후 왜적과 세 번째로 접전하여 적을 섬멸시키고 해상권을 장악하는 동시에 적의 해상 보급로를 차단하여 왜군의 사기와 전의(戰意)에 큰 타격을 준 곳이기도 하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진(陣)을 친 이후, 늘 이 집에 기거하면서 휘하 참모들과 작전계획을 협의하였던 곳이며 집무실이기도 하다. 이곳은 난중일기(亂中日記) 총 1,491일분 중 1,029일의 일기가 여기에서 쓰여 졌고, 여러 편의 시를 남기기도 했던 곳이다. 전쟁의 와중에서도 시를 썼다는 것은 무엇을 바라는가! 장군의 인간성을 지키려 노력했다는 뜻이다.



특히 이곳은 원래는 운주당(運籌堂) 터이다. 운주당이란 이순신 장군이 가는 곳마다 기거하던 곳을 편의상 부르고 있는 곳인데, 1740년(영조 16)에 통제사 조경(趙儆)이 이 옛터에 유허비(遺墟碑)를 세우고 제승당이라 이름한 데서 비롯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930년대에 중수한 것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건물이다. 경내에는 유허비·기념비·귀선각(龜船閣)·한산정(閑山亭)·대첩문(大捷門) 등이 있으며, 1976년 성역화 작업으로 정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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