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창 한국전자통신연구원 박사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춥다고 느껴졌다.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박사논문을 완성하기 위해 다들 퇴근한 연구실에서 나는 불면의 날들을 보냈다. 화장실 갈 시간도 아껴가며 작성한 학위논문을 수정하고 또 수정하느라 눈은 충혈되었다. 충분하지 않은 수면으로 인해 머리 속이 텅 빈 것 같아 뇌기능을 상실해나가는 것만 같았다. 기왕 시작한 것, 끝을 맺어야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체력적으로 힘들어 집중이 어려운 날에는 마치 마라톤 선수가 달리기 과정에서 고통을 인내하다가 골인 지점을 통과할때의 강력한 희열을 기대하며 하루하루 인내하였다.
고생은 늘 그렇듯이 끝이 있기 마련이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여러차례에 걸친 힘겨운 심사 끝에 논문통과가 결정되었고 무사히 졸업을 하였다. 졸업 이후 당시 논문 심사위원장을 맡아주셨던 노 교수님을 찾아 뵈었다. 나의 논문은 학과 규정에 따라 한글이 아닌 영어로 쓰여졌고, 심사위원들 역시 영어로 된 논문을 심사했다. 남이 쓴 논문, 그것도 영어로 쓰여진 논문을 검토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나 역시 다른 사람의 논문심사를 해보았지만 학술논문이나 학위논문이라는 것이 매우 전문적인 영역의 심도있는 내용을 내용으로 하다보니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심사위원장이셨던 노 교수님은 미국 유학파지만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작성된 남의 논문을 몇 번씩이나 완독하시면서 꼼꼼하게 검토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 분명하지만 그분께서는 그렇게 하셨다. 그분은 퇴직을 얼마 남겨두고 있지 않은 상태였지만 학문에 대한 열정은 젊은 교수들에게 전혀 뒤지 않을 정도였다. 높은 수준의 학문적 경험, 인생을 열정적으로 사는 모습, 삶에 대해 지혜로운 신면 등 닮고 싶은 점이 많은 노교수께 가르침을 받고 싶어 여쭈었다.

"교수님, 제 나이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떤 것을 하고 싶으세요?"
잠시 생각하시더니 말씀하신다.
"놀고싶어. 젊었을때 놀지 못한게 후회가 돼. 난 안 놀아봐서 놀 줄도 몰라."

혹시 말씀하신 논다는 것이 내가 알고있는 관점과 다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를 다시 여쭈었다.

“어떻게 놀고 싶으세요?“여행도 가고, 인생을 즐기고 싶어”

평생을 스스로를 제어하며 학문에 몰두하시면서 노는 일, 즐기는 방향보다 늘 중요한 일, 미래를 위한 일을 선택해 오신 교수님의 반전에 가까운 말씀이 십수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에게 각인되어 있다.

여행을 사전에서 찾아보았다.
“일이나 유람을 목적으로 다른 고장이나 외국에 가는 일“로 표기되어 있다. 생각난 김에 관광은 어떨까 싶어 찾아보았다. ”다른 지방이나 다른 나라에 가서 그곳의 풍경, 풍습, 문물 따위를 구경함“

사실 여행과 관광의 큰 차이는 없어 보인다. 둘다 다른 지역이나 외국에 가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관광보다는 여행을 간다는 말을 많이 쓴다. 그것은 아마도 여행은 다른 지역이나 외국을 가는 과정과 그 경험 전체를 아루르는 어찌보면 관광보다도 더 큰 의미를 갖는 단어 때문이 아닐까 한다.

우리 조상들은 ‘노세노세 젊어서 노세’라고 했다. 또 누군가는 말한다. ‘여행은 젊고 가슴 떨릴 때 하는 것이고, 나이들어 다리가 떨릴 때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그러나 여행에 젊은 사람과 나이든 사람의 차이가 있을까 싶다. TV 프로그램 중에 “꽃보다 할배”라는 프로그램이 얼마전 방영되었다. 최근의 예능 프로그램이 먹방 등 젊은 청춘이 공감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이 프로그램은 평균연령 80세 가까운 분들이 출연하여 함께 여행하며 일어나는 일이 주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존의 여행 프로그램과 달리 시니어 세대의 호기심, 감동, 소소한 취향을 반영하고 여기에 개인의 스타일과 결부해 벌어지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담았다. 난 이 프로그램이 좋다. 소위 왕년에 배우로 잘 나가던 분들, 자기 분야에서 최선을 다한 삶을 살아온 분들이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여 꾸미지 않고 시청자들과 소탈하게 소통하는 모습이 재미를 넘어 닮고 싶기도 하다.

도저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수십년 만의 뜨겁고 견디기 힘들었던 여름이 이제 지나가고 추석이 다가오고 있다. 당장 해야 하는 일, 지금하고 있는 일도 중요하지만 푸른 하늘과 미세먼지 없는 더 할 나위없이 이 좋은 계절 가을에 지인이나 사랑하는 사람들과 여행을 떠나 보는 것은 멋지고 행복한 일일 것이다.

시간이 더 지나 여행이 힘들기 전에 가자.
인생이라는 즐거운 소풍의 길에서,
할 것은 하되, 즐기다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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