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항해술이 발달하면서 외국 선박들이 중국으로 들어오게 된다. 그러면서 황제 도광제(道光帝)때 부터 서양으로부터 큰 충격을 받게 되는데 이를 ‘웨스턴 임팩트(Western Impact)라고 한다. 영국은 무역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아편을 청에 수출하였는데 중국에서는 은의 반출량과 아편중독자가 증가하면서 도광제는 임칙서(林則徐)를 파견하였다. 임칙서는 아편을 모아 불태워버렸고 청나라의 강경한 조치로 인해 영국의회에서는 영국자본가들의 의견을 들어 원정군을 파견하였다. 그리하여 1840년부터 아편전쟁이 시작되었다.
아편전쟁에서 패한 청나라는 영국과 1842년 난징조약을 맺고 홍콩을 영국에 할양하게 된다. 이 조약은 청나라가 맺은 최초의 불평등 조약이자 근대적 조약이다. 이후 미국, 프랑스 등 다른 서구 열강에 의해 불평등 조약을 맺게 되었고 서구 열강에 조차지를 뺏기게 되었다. 이렇게 청나라는 점점 세력이 약화되었다. 그리고 이때, 외환(外患)뿐만 아니라 내우(內憂)까지 발생하게 된다. 광동성과 화현에서 기독교 계통의 ‘상제회(上帝會)’가 봉기를 일으켜 ‘태평천국(太平天國)’을 수립하였다. 청나라 내부는 큰 혼란에 빠졌다.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지식인들은 혁명을 준비하였고 이때 등장한 사람이 바로 쑨원(孫文)이다. 그는 여러 혁명조직을 하나로 합치고 삼민주의(민족, 민권, 민생)을 내세우며 여러차례 봉기를 일으킨다. 1911년 10월, 청나라가 외국에 철도를 넘기려고 할 때 청나라에 반기를 든 군인들이 혁명파에 합류하면서 우창에서 봉기를 일으킨다. 그러면서 1912년 1월 1일에 쑨원을 임시총통으로 하는 동양 최초의 공화국인 ‘중화민국’을 건국한다. 하지만 중국 대륙의 모든 곳에 세력을 미치지는 못하였다.
1921년 중국공산당이 창당돼 점점 세력을 키워갔고, 1925년 쑨원이 세상을 떠난 이후 장제스(蔣介石)가 국민당의 1인자가 되었다. 이후 장제스는 북벌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면서 당시 1차 국공합작이 깨지지 않은 상태였으나 공산당을 대거 숙청하여 국공합작이 깨지게 된다. 이후 일본의 중국에 대한 침략이 가속화되고 장제스가 감금되는 시안사건이 일어나면서 1937년 2차 국공합작이 성립되었다.
하지만 1945년 일본이 패망하면서 태평양전쟁이 막을 내리고 국민당과 공산당은 중국을 걸고 내전에 돌입하였다. 당시 국민당의 부패와 심각한 인플레이션으로 국민당은 민심을 잃었다. 결국 장제스의 국민당은 공산당의 모택동(毛澤東)에게 패해 대만(臺灣)으로 도망쳤고, 난징에 있던 국민당 정부를 타이베이(臺北)로 옮겼다. 전세가 불리해졌을 때부터 장제스는 최후의 보루로 대만을 생각하고 있었고 1948년부터 중화문화의 유물 중 가장 진귀한 것들 대만으로 옮겨 놓았다. 그래서 현재도 중화문화의 가장 진귀한 보물들은 베이징고궁박물관이 아닌 타이베이 고궁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하, 상, 주나라로부터 시작된 한족의 역사는 결국 중국 대륙의 ‘중화인민공화국’과 대만의 ‘중화민국’으로 나뉘었다. 이와 같은 역사의 흐름은 우리 한민족과 비슷하다. 사실 상 현재 중국과 대만은 정전 상태이지만 대만은 국제적으로 나라로 거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대만은 1971년 UN의 상임이사국을 중국에게 넘기는 것을 시작으로 여러 나라들이 단교를 하고 중국과 수교를 맺으면서 점점 국제적으로 고립이 되었다. 왜냐하면 중국은 ‘하나의 중국’이라는 원칙을 고수하기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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