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서에서 라디오DJ·PD, 팝 컬럼니스트까지 만능 엔터테이너”

전국 무대를 석권한 아마추어 국가대표 복서에서 라디오방송 DJ와 PD, 팝 칼럼니스트 게다가 국민가수 신승훈을 발굴하고, 디자인광고회사를 운영하며, 아파트를 짓는 부동산개발사업까지, 이 모든 것을 한사람이 해온 일이라면 믿기지 않을 것이다. 오는 3일 대전체육고등학교 총동문회장에 취임하는 성현기 신임회장의 얘기다. 기자는 이런 보기 드물다 못해 독특한 이력을 가진 성현기 회장을 만나 그의 얘기를 들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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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체육고총동문회 회장 취임을 미리 축하드린다.

“축하를 받을 때마다 부담이 앞선다, 내가 3회 졸업생인데 모교를 졸업할 때는 10개 종목에 전체인원이 75명밖에 되지 않았다. 올해 40회 졸업생을 배출하는데 현재도 19개 종목에 학년 인원이 95~100명 정도다. 이런 소수 인원이 전국에 흩어져서 체육지도자와 교육자, 사업가 등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보니 동문회에 참석하기가 쉽지 않은 환경이다. 그런데도 3년간 같이 밥 먹고 잠자던 정이 있어서 그런지 참 많이들 온다. 와봤자 밥한 끼 먹고 얼굴 보고 가는 것이 전부인데”

▲전원이 기숙사 생활을 했기 때문에 일반인문계 고교와는 다른 끈끈함이 있겠고 재미있는 동문회가 될 것 같은데.

“그런 면에서는 최고라고 말할 수 있다. 9회 장순(박장순, 레슬링국가대표 감독)이가 96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것을 자랑하고 다닐 때 정말 기분 좋았고, 88년 서울올림픽과 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 은메달에 머물 때는 누구보다도 안타까워하며 TV 앞을 떠나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우린 동문이라기보다는 형제 같은 느낌이 있어서 그런 것 같다. 동문회에서 만날 때면 식구들 안부까지 물으며 정말 반갑게 만난다”

▲동문회장을 수락할 때는 계획도 있었을 것이고 임기 중에 이루어야 하는 현안도 있을 것 같은데.

“지난해 모교를 이전하는 문제가 대두된 적이 있었는데 협의 대상에 동문회는 쏙 빠져있더라. 그래서 강력히 항의하고 언론계에 종사하는 옛 동료 선배, 후배들에게 부당함을 전파하기 위해 1개월 이상을 뛰어다녔더니 이전검토가 무산되더라”

▲모교 이전에 반대를 하는 것인가.

“지금 운동장에 깔린 잔디도 우리 손으로 직접 심었다. 그만큼 애정과 애착이 많다고 보면 된다. 이전을 검토한다면 이런 동문의 의견도 수렴해야 하고 이전할 곳이 어떤 위치에 어느 수준의 시설을 해줄 것인지도 꼼꼼히 따져 봐야 한다. 결국은 지금 재학 중인 후배들과 앞으로 대전체육고를 선택할 미래의 후배들이 더 좋은 환경에서 운동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듣기에 따라서는 성현기 신임회장은 모교이전에 반대하지 않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개인적인 의견을 전제로 얘기한다면 무조건 반대는 않는다. 하지만 내 의견도 동문의 한 사람의 견해일 뿐이다. 이 문제는 추후에 다시 거론되더라도 우리 동문의 충분한 의견수렴 없이는 절대로 용인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동문회를 제외하고 다시 이전검토가 이루어진다면 좌시하지 않겠다고 분명하게 견해를 밝혔다. 또한 임기 중에 교육청, 체육회, 산하연맹 등 관계기관 및 경기단체와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여 모교 지원에 불이익이 없도록 하려고 한다. 우리 모교는 현재 재직 중인 초중고의 간부교사(교장, 교감)가 대전 16명, 충남 30명 등 전국에 50명 이상이 된다. 대전, 충남에서 단일 고교로는 가장 많은 간부 교사가 재직하고 있는 명문고라고 모교를 자랑하고 싶다. 또한, 프로축구 감독, 국가대표 감독, 브라질에 축구학교를 설립하고 프로축구 K-리그에 많은 선수를 배출하는 교육사업가 등 사회 각 분야에 유능한 동문이 많다. 이런 훌륭한 동문의 명예를 지켜나가는 것도 동문회장의 몫이 될 것이다”

▲대전, 충남에서 현재 재직 중인 교장·교감 선생님들 가운데 대전체육고 출신이 가장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

“ 이 정도면 이미 명문고 반열에 올라있다고 본다. 우리가 그간 홍보가 부족해서 그렇지. 앞으로 대전체육고에 많은 관심을 주길 바란다”

▲국가대표상비군까지 지냈는데 왜 중도에 복싱을 그만뒀는지 궁금하다.

“바로 그만둔 것은 아니다. 한때는 복싱을 제대로 해보려고 좋아하는 팝 음악도 멀리하며 훈련도 열심히 했는데 고비마다 넘기 어려운 벽이 있더라. 대표선수를 이겨서 대표 팀에 선발이 돼도 그 선수와 비공식 평가전을 몇 번씩 시켜서 탈락시키거나 국제경기 경력이 없다며 해외 경기 나갈 때면 나한테 패한 선수 데리고 나가는 꼴을 당하며 복싱을 그만뒀다. 복싱을 그만두기로 마음을 굳히면서도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결심을 했다. “그 선수와 단 한 경기만 더하고 그만둔다고” 그래서 1981년 9월 광주염주체육관에서 열린 대통령배전국복싱선수권대회 겸 국가대표선발전에 출전했는데 하늘이 도왔던지 예선 첫 경기에서 그 선수와 만나는 대진 운이 따랐다. 동일체급에선 사실상 결승 같은 그 선수와 나의 예선 첫 경기는 소문난 라이벌의 대결이라서 광주염주체육관을 복싱 팬으로 가득 채웠다. 당시 복싱은 최고의 인기스포츠로 자리를 굳건히 하고 있어서 아마추어복싱도 전국대회 결승전이 열리는 날에는 체육관이 만석을 이루던 시절이었다. 통쾌한 KO로 경기를 끝내고자 했지만, 다운 한번 시킨 것으로 만족하여야 했다. 결국, 그 선수에게 심판전원일치 판정승을 거두고 복싱을 접었다. 당시 동아대학교에 재학 중이었던 그 선수는 나보다 4살 정도가 많았고 그 후에도 국가대표로 활약한 거로 알고 있다“

▲ 방송은 언제부터 했나.

“1987년 4월 1일에 대전MBC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 DJ로 첫 방송을 시작했다. 그해 2월 대전MBC에서 진행자공채를 한다는 방송안내를 접하고 지원을 했는데 놀랍게도 면접관이 당시 내가 DJ로 일하는 대전 은행동 모아카페 단골손님이셨다. 그분이 대전MBC 상무님 이란 사실은 몰랐고 요들송을 좋아하는 멋진 중년남성이란 생각이 들어서 오실 때마다 신청곡 안 하셔도 Slim Whitman의 요들송을 자주 들려드렸던 인연 덕분일까 MBC진행자 공채에 턱걸이해서 방송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운도 있었던 것 같다. 쉽지 않은 경쟁자들도 많았을 텐데

“모아카페는 나에게 참 많은 인연을 만들게 해준 곳이다. 신승훈도 거기서 처음 만났다”

▲신승훈 얘기 좀 듣자. 어떻게 처음 만난건가

“국민가수의 과거얘기를 함부로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닐 것 같고, 나중에 기회를 봐서하면 좋을 것 같다”

▲그래도 둘이 가장 가까이 지낸 사이로 아는데 조금은 해줄 수 있는 것 아닌가 데뷔 음반 표지에도 현기 형에게 고맙다고 했던데.

“처음 승훈이를 만난 것이 1986년 초봄쯤으로 기억된다. 노래를 하고 싶다며 두텁게 보이는 겨울 외투를 입고 파마머리에 큰 뿔테 안경을 쓴 친구가 기타를 들고 찾아와서 노래를 2곡 시켜봤더니 입술을 마이크에 묻고 눈을 꽉 감은 체로 이문세의 “파랑새”하고 뭔 노래인가 한 곡을 더했는데 달리기하는 사람처럼 노래를 급하게 해서 심란했다. 그래서 그냥 집에 보냈는데 매일 밤 모아 카페를 찾아와서 노래 시켜달라고 떼를 써서 질긴 인연이 시작 되었다. 당시에 모아카페에서 DJ를 하던 후배 전득희가 밴드의 싱어 출신이라서 노래하는 기본을 터득했기에 득희를 시켜서 마이크 쓰는 방법부터 가르치고 카페 영업이 끝나면 무대에 올려서 노래연습을 시켰다. 3주 정도 지나서 들으니 나름 감성이 있는 보이스가 느껴져서 그 다음부터는 카페 영업시간에 정식 스테이지에 올렸더니 손님들한테 반응이 괜찮아서 나도 슬쩍 놀랬었다“

▲ 타고난 소질이 있었다는 얘기인가.

“누구나 그만한 소질은 타고나는데 기회가 좋았던 거지. 승훈이는 나를 만나고 1년 만에 내가 별밤 DJ로 활동하게 되자 곁에서 이광조, 한영애, 조덕배, 이주호, 그리고 지금은 고인이 된 장덕, 김광석 등 그 시절에 노래 잘하는 가수들을 자주 접하다 보니 시야도 넓어졌고 노래를 어떻게 불러야 되는지도 알게 된 것이다”

▲MBC 상무님 덕분(?)에 진행자 공채에 합격한 성회장 이나 가수 지망생 신승훈 모두 행운이 따랐네.

“그렇다고 봐야지”

▲신승훈을 5년 동안 트레이닝 시키며 1집에 실린 곡 작업까지 함께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왜 직접 제작을 안 했나 했으면 돈벼락도 맞았을 텐데.... 너무 아픈 질문을 했나.

“제작을 안 한 것이 아니고 못한 거다. 그게 잘 안되더라고 인연이 거기까지였던 것 같다. 난 승훈이에게 1년 정도 더 있다가 음반을 낼 것을 권유했고 주변에서는 지금도 충분하다고 부추겨서 혼란이 왔었다. 결국 승훈이는 당시 내 여친이 쓴 ”미소 속에 비친 그대“ 가사 등 나와 함께한 작업했던 것을 통째로 들고 사맹석이란 변두리 제작자에게 가서 음반을 냈다. 그 변두리 제작자는 그야말로 돈벼락을 맞기도 했는데 그렇게 번 돈은 오래 못 지키나 봐, 못 지키고 살더라고”

▲화가 많이 났었을 것 같은데 가만히 있었나.

“물론 배신감에 화가 많이 났었다. 쫓아가서 야단도 치고 방송하며 신승훈 노래 안 틀기도 했었지만 그거 결국 내 얼굴에 침 뱉기 밖에 안되고 사람만 초라해지더라. 그래서 참으며 세월을 보냈는데 어느 날 보니깐 승훈이도 어른이 되어있었다. 세월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지금은 현대 차의 고급 브랜드로 론칭이 된 차가 처음 나왔던 2008년에 그 차도 한 대 줘서 받아 탈만큼 이제는 옛정을 나누며 잘 지내고 있다고 보면 된다”

▲그래도 아쉬움과 애증이 많을 것 같은데 .

“1년 정도 더 음악을 공부하고 준비해서 데뷔를 했으면 좋았을 것이란 생각은 지금도 든다. 초기처럼 “미소 속에 비친 그대” “보이지 않는 사랑” 같은 대곡이 나오지 않는 것은 운동으로 비유하면 기초체력 연마가 부족해서 그렇다. 물론 신승훈은 다른 가수들과 비교하면 기초가 잘 갖추어진 가수이긴 하지만 내가 발굴해서 육성시키며 본 관점에서는 그렇다는 얘기다. 그 점이 지금까지도 아쉽긴 하지만 이제 국민가수 얘기는 그만했으면 좋겠다”

▲신승훈, 박강성, 김지연 등 8명의 대전 출신 가수들이 함께한 음반을 제작했던 얘긴 꼭 듣고 싶다.

“어디서 쓸데없는 정보는 많이 모아오긴 한 것 같은데 의미를 둘 일은 아닌 것 같다. 방송하며 운영했던 음악감상실을 그만두고 한가할 때라서 내가 박강성과 친구 사이고 승훈이, 지연이는 제자 같은 후배들이니깐 그냥 우리 지역 가수들의 선후배 화합을 위해 잠깐 시도한 것이다”

▲뭘 할 것인지 구체적인 계획도 없이 방송사를 뛰쳐나왔단 얘긴가.

“항상 그래왔다. 복싱을 할 때도 뭔가 아니라고 생각되면 접었듯이 그런 역마살 같은 기운이 내 몸에 있는 것 같다. 지금 하는 사업도 언제까지 할 것이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다. 칼럼은 젊은 날부터 지금까지 쉬다가도 다시 쓰곤 하는데 칼럼 쓰는 것 말고는 하다가 그만둔 전과(?)가 너무 많아서 지금 하는 일에 집착하려고 노력 중이다”

▲방송일 그만두고 나와서 무슨 일을 맨 처음 시작했나.

“뭔가를 표현하려면 디자인이 필요할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 디자인 회사부터 만들었다. 다음에 음악과 옛 것을 접목해서 복고풍 주점을 선배와 기획해서 장사를 했는데 반응이 좋아서 대전을 중심으로 서울, 부산까지 전국에 30여 개 체인점을 뒀지만 푼돈에 민감해지는 업종이라서 그만뒀다. 선배는 지금도 혼자서 사업을 잘하고 있지만 나하고는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 업종이란 것을 느끼는 순간 접었다. 그다음에 다자인 회사로 분양광고시장에 진출해서 부동산 분양시장의 흥미로움에 빠져 결국 부동산 개발사업을 하게 되었다”

▲부동산 개발 시장에서 기반이 탄탄하다는 소문을 들었다.

“광고마케팅 분야는 대전, 충청권을 넘어 타 지역 물량을 수주할 만큼 성장했지만 개발 사업은 이제 겨우 기반을 다지는 수순을 밟고 있는 중이다”

▲충북 옥천의 아파트 사업은 잘 끝났다고 들었고, 현재 진행 중인 대전은 분양 100% 완판으로 성공사업의 신화를 이룬 것 아닌가.

“그만한 성공은 부동산 개발 시장에 흔한 일이다. “신화” 이런 표현은 대전에서는 스마트시티 아파트 정도는 되어야 한다. 나중에 대전에서 랜드마크란 평가가 나올만한 사업을 할 때 붙여줬으면 고맙겠다”

▲앞으로 계획을 묻는다면.

“계획이 별로 없다. 요즘은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숙제처럼 앉고 산다. 우선은 자질이 부족하지만 총동문회 일을 맡았기에 열심히 해야 될 것 같고, 규모보다는 사람들한테 오랫동안 편한 집으로 기억될 아파트를 300세대 정도 짓는 꿈도 꾸지만 또 어떻게 변덕을 부릴지 나도 나 자신을 잘 모르겠다”

언뜻 접하면 충동대로 살아온 사람처럼 보이는 대전체육고총동문회 성현기 신임 회장에게서는 인터뷰 내내 의외의 꼼꼼함이 느껴졌다. 하고 싶은 일을 따라 진로를 여러 차례 변경하기도 쉽지 않고 성공한 예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가 기자의 표현대로 보기 드물다 못해 독특한 이력을 갖고 살면서도 성공한 사업가로 평가받기까지는 충동을 감당할 수 있는 꼼꼼함과 무슨 일이든지 시작하면 혼신을 힘을 다하는 남다른 의지가 있었을 것이란 추축도 되고, 한편으로는 애지중지 아꼈던 살림살이를 이사를 할 때 1/4쯤 버리고 뒤늦게 마음이 후련했던 것처럼 그는 버리고 사는 방법을 일찍 체득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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