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교육청 장학관 신경희

올해도 달랑 한 달밖에 남질 않았군요.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가늠치 못한 채 정신없이 살고 있습니다. 무에 그리 바쁘다는 건지. 톱니바퀴에 끼어 마구 돌아가는 느낌입니다. 이것저것 신경 쓸 것 많은 일상과 사람에 치여 힘이 빠져 있습니다. 알록달록한 간판처럼 산만하고, 마음이 쇼윈도 불빛처럼 산란합니다.

이런 삶에서 조금만이라도 비켜서고 싶어 불현 듯 신간을 주문했습니다. 줄리 포인터 애덤스의 <와비사비 라이프>가 그것입니다. ‘와비사비’란 일본어 ‘와비’와 ‘사비’가 합쳐진 말이라는군요. ‘와비(わび)’는 단순한 것, 덜 완벽한 것, 본질적인 것을 의미하고, ‘사비(さび)’는 시간의 흐름을 받아들인 오래된 것, 낡은 것을 뜻합니다.

눈이 뻑뻑하고 시려올 때마다 따뜻한 차 한 잔과 함께 짬을 내 읽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일본 미국 덴마크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에서 ‘와비사비’의 정신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저자는 “와비사비는 꽃잎을 떨구는 작약이나 저녁시간에 울리는 성당 종소리처럼 소소하고 드러나지 않는 아름다움을 알아차리고 음미하는 습관이다. 날카롭게 날을 세우고 회의적으로 생각하고, 두려워하는 태도를 버리고 기꺼이 그 순간을 즐기려는 의지다.” 라고 전합니다.

빠르게 돌아가는 삶을 잠깐 멈추고, 단순하고 느리게 간결하면서도 담백한 작은 행복의 비밀들을 만지작거릴 수 있는 고마운 시간입니다. 멈추니까 비로소, 덧없음에 깃든 아름다움까지도 설핏설핏 맛볼 수 있어 좋습니다.

▷사소한 일은 그대로 흘러가게 한다 ▷부족해도 덜 완벽해도 그게 인생이라 믿는다 ▷나에게도 타인에게도 솔직해진다 ▷마음은 언제나 느긋하게 ▷산책은 필수 ▷물질적인 것에 휘둘리지 않는다. 저자는 친절하게도 ‘와비사비 라이프’로 가는 오솔길로 안내해 줍니다.

서둘러 밥을 먹고, 후다닥 대화를 나누고, 휴대폰을 몇 번이나 들여다보며 문자나 이메일을 거듭 확인하는 일상의 삶을 되돌아봅니다. 빠르게 변화하고 화려한 이미지들이 넘쳐나는 요즘, 나만의 속도와 색깔을 지키며 산다는 것은 참으로 쉽질 않습니다. 잠깐이라도 멈추어 진짜 멋이 무엇인지, 가진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게, 즐겁게, 나를 아끼며 살아갈 수 있는 것들을 건네받습니다.
어린 시절, 팔베개를 하고 누워 구름을 올려다 본 일을 가만히 불러봅니다. 지금이라고 못 할 것도 없습니다. 팔짱끼고 뒤로 물러 앉아 시간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따라가도록 관망합니다. 때마침, 우리지역에 첫눈이 왔습니다. 포항 지진으로 일주일 연기된 수능일이라 1시간 늦게 탄 무궁화호 기차에서 그동안 무심히 스쳐 보낸 것들에게 하나하나 의미를 부여하며 느림의 미학을 만끽했습니다.

어니 젤린스키는 <느리게 사는 즐거움>에서 ‘때로는 뭔가 일이 되도록 애쓰지 말고, 차라리 일이 되는대로 일어나도록 놔둬 보는 것도 좋다.’고 했습니다. 산자락 외딴 집 굴뚝에서 빠져 나온 연기가 흩어지듯이. 단순하고 느리게 고요히, 무엇이 삶에서 진정 본질적인 것인가를 묻습니다.

‘당신은 어느 때 우느냐고 파도를 밀치며 그가 물었을 때, 행복을 알고도 가지지 못할 때 운다고 말하고 말았습니다. 보일까 말까 한 작은 간이역이 행복이었거든요.’라고 답했다던 어느 노시인의 인터뷰가 생각납니다. 안부를 물어오는 구름을 업은 저물녘 화첩 속의 붉디붉은 나는, 그것은 아직 내가 살아보지 못한 비밀의 숲입니다.

저작권자 © 대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