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교육청 장학관 신경희

시월이 갔습니다. 80년대 유행가 ‘잊혀진 계절’은 10월의 마지막 밤에 애절한 의미를 부여하며 삼십여 년 동안 가슴 속을 잔잔히 흘렀습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 올해도 어김없이 잊혀진 계절은 망망 가슴 속으로 흘러갔습니다.

11월도 또 그렇게 달려가겠지요. 달력에는 주말마다 행사가 줄줄이 걸려있어 늦가을 정취를 만끽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 명약관화하거늘. 허망이 가버린 시월이 아쉬워 11월 첫날, 늦은 오후를 뚝 잘라 의기투합했습니다. 그리고는 무작정 만추(晩秋)바람 손잡아 떠났습니다. 출장 나간 팀원들은 어찌할 수 없었지요. 사무실에 콕 박혀있던 우리들만이 인근에 자리한 ‘왕대사’를 향했습니다.

밖으로 나온 우리는 스위치가 눌린 전등처럼 얼굴이 밝아졌습니다. 단단하던 마음도 비누방울보다 가볍게 부유했습니다. 짙어진 가을 색을 가득 품은 왕대산이 토해내는 쓸쓸하면서도 달콤한 향기. 고즈넉한 산사에는 풍경소리만이 덩그렁. 덩그렁. 적막하고 공허했습니다. 금방이라도 후드득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단풍나무에 올라 다 늦은 가을볕에 가슴을 내어주고 싶었습니다.

허공 어딘가 통점을 꾸우~욱 누르면 가을 시(詩)들이 우수수 쏟아질 것 같은 날. 가을이 주는 특별한 선물인 생각의 시간, 그림 같은 하늘, 번지 점프하듯 떨어지는 단풍을 가슴에다 맘껏 그렸습니다. 서러운 아픔의 꽃이 단풍이라는 걸 기억하면서. 우리는 그렇게 저무는 만추풍경의 발목을 오래도록 잡고 있었습니다.

그리움의 준말은 그림이고, 그림에 준말은 글이라고 했던가요. 가을이 깊어갈수록 그리운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고 싶어집니다. “그리움이 남아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 아직도 너를 가지고 있다는 거다.” 라 던 시인의 말이 생각납니다.

오늘 밤엔 별빛에 안테나를 대어놓고 들어설 수 없는, 너를 향한 그리움의 편지를 써야겠습니다. ‘너에게 쓴 마음이 벌써 길이 되었다고, 너에게 쓴 마음이 벌써 내 일생이 되었다고, 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너에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굽은 길)이었다고’ 감처럼 빨갛게 익은 너를 향한 그리움을 울컥 쏟아 내야겠습니다.

나이 들수록 낙엽 지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고 했습니다. 단풍이 드는가했더니, 벌써 낙엽 지는 소리가 가슴으로 스밉니다. 묻지도 않았는데, 갈 길을 간다는 듯 손사래 치며 뚝 뚝 떨어집니다. 꽃은 눈으로 지지만 낙엽은 가슴으로 진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사는데 과연, 크고 우람한 일은 무엇이며 작고 가벼운 일은 무엇인가를 생각합니다. 인생은 숨을 쉰 횟수가 아니라 숨 막힐 정도로 벅찬 순간을 얼마나 많이 가졌는가가 중요하다지요. 만추 그 어느 날 무작정 내려놓은 오후, 구름 같은 자유. 낙엽 지는 소리를 들으며 눈이 시리도록 마신 단풍놀이는 화려하다 못해 서러웠습니다.

저작권자 © 대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