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교육청 장학관 신경희

아픈 사람처럼 기력이 없던 모들이 어느새 땅내를 맡고 빛깔이 선명해졌습니다. 가뭄이란 큰 산을 넘어 선 겁니다. 곧 초록의 힘으로 돌도 삭혀 낼 청춘시대가 열리겠지요. 이주일여 동안 기침감기를 앓았습니다. 앓고 나니 열 살은 더 먹은 듯합니다. 오랜 기침에 너무 힘들었고 만사 귀찮았습니다. 밤새 기침한 날은 뻑뻑해진 눈으로 종일 비몽사몽 허덕이기도 했습니다. 어처구니없이 허망하게 무너지는 그런 날들의 연속이었습니다.

어느 날은 갑작스레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중저음 보이스로 변질돼 가수 문주란의 목소리로 며칠을 살기도 했습니다. 그 동안 작은 체구에 보약 물 한 잔 안 주고 마구 빼 먹기만 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싶었습니다.

근자에 무리한 해외 출장을 다녀온 탓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터무니없이 나이를 먹은 탓이라 돌립니다. 감기에 잘 걸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설령, 감기 기운이 돋아도 병원은커녕 약을 먹지 않고 잘 견뎠습니다. 그런데, 이젠 통하지 않나 봅니다. 면역력도 닳고, 나이 탓이라 생각하니 뭔지 모르게 짠합니다.

간간히 토닥거리던 글도 한동안 손을 놨습니다. 지난 주말에는 좀 나아졌다 싶어 모처럼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마음만 있지 한발도 나아가질 못했습니다. 이 걸 어쩐다지, 그냥 막막했습니다. 나이 들수록 더 할 텐데 큰일이다 싶습니다.

가물가물 희미해지는 것들, 귀 얇아지는 것, 감기 하나 제대로 넘지 못하는 것은 모두 나이 탓입니다. 또 있습니다. 가끔 대나무처럼 고독해지는 것, 문득 아리고 시리게 보이는 것, 만남의 깊이만큼 두려움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나이 탓 하다 보니 예전에 만났던 시구가 떠오릅니다.

<꼬장꼬장하던 성질이 휘어지고/불꽃같던 성격이 자지러지는 것도/다 나이 탓이다. 나이의 무게에 눌려 기가 꺾이고/나이의 위엄에 꿀려 풀이 죽는다./한참 잘 나갈 때
겁 없이 밀어붙이고/주저 않고 깔아뭉개던 용기가/나이에 압류되고 나서/무릎에 신경통이 둥지를 튼다./기고만장하여 군림하던 패기가/고개를 숙이고/좁쌀 같은 일에도 화를 끌어올리던 자존심이/나이에 낚여 펄떡 거린다.> 이길옥 시인의 ‘나이 탓’ 시(詩) 일부입니다. 그 때는 그냥 웃음 짓고 말았는데, 지금은 다릅니다. 딱 제 모습이지 뭡니까.
나이 탓만 하려고 하니 나이를 헛먹었나 봅니다. '내 나이가 어때서' '나이야 가라' 하며 사는 사람도 많은데 말입니다. 이번 기침 감기를 앓고 나니 새삼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휴식이 달콤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것이 일상이 아닌 일탈 때문이라고 합니다.

주말이나 또는 가끔씩 시간을 들여 자신을 돌보고, 그 무엇보다 달달하게 쉬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또 있습니다. 나이 탓만 할 게 아니라 나잇값을 하며 살아야겠습니다. 비싼 대가를 치르며 나이를 먹었으니까요.

오늘 새벽에도 우리고장 흥림 저수지의 물안개가 침침하게 피어오르는 것을 보며 출근했는데, 벌써 하나 둘씩 별이 돋습니다. 깊어진 밤에 별을 한 번 더 돌아보고 창문을 닫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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