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희 충남도교육청 장학관

새로운 일터에서 보낸 지 십여 일이 됐다. 어찌어찌 지나갔다. 십여 년 전 대전으로 출퇴근하던 그 시절을 떠 올리며 이정도 쯤이야 했는데, 예전 같지 않고 그게 쉽질 않다. 집에서 멀어진 일터 덕분으로 동틀 때의 고요함. 초가을 새벽공기가 전해주는 상쾌함. 그동안 맛볼 수 없었던 호사를 누리고 있다. 덤으로 오가는 길에는 몰라보게 높아진 하늘. 하루하루 다른 빛으로 열리고 있는 풍경. 무성히 익어가는 게 있고 열렬히 짙어가는 것들이 있다. 계절은 적어도 지금 우리가 어디에 와 있는지를. 어디에 살고 있는지를 조금 많이 알게 해준다. 숨겨놓은 긴장이 가져다주는 멀미까지도 한동안 즐겨 보려 한다.

다른 때보다 일주일 여 빠르게 발표했던 인사 덕분으로 그동안 주변은 물론, 차곡차곡 마음 정리를 해 오긴 했었다. 그렇지만 그게 어디 청소하듯 깔끔하게 정리되는 것들이던가. 알게 모르게 스며 든 미운 정 고운 정. 그러한 인연을 정리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만나면 언젠가 헤어지기 마련이고 간 사람은 반드시 돌아오고, 태어난 것은 반드시 죽는다는 존재의 무상을 새삼 곱씹으며 뜨거운 8월을 마무리했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특별히 중히 여기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지금 여기,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이다, 지금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며 살면 다 된다는 믿음이다. 이 사실을 알기까지는 꽤 오래 걸렸다. 내가 좋은 사람이 되지 않으면 절대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을. 내가 사람으로 행복한 적이 없다면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는 것을. 그러한 마음을 들키기라도 한 듯. 꼭 그 마음을 읽어 준 남자가 있었다. 이병률 작가다. 그의 신간 <내 옆에 있는 사람>이 8월의 어느 날 품으로 찾아들었다. 그 곳엔 여행을 하며 만난 예상치 못한 인연들과 쌓아 올린 삶의 풍경. 더욱 더 진하고 웅숭깊어진, 사람에 대한 애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동안 매주 찾아드는 휴일이 귀하고 고마운지를 모르고 살았다. 늦잠이 주는 달콤함, 맘껏 늘어질 수 있는 시간이 이렇게 행복할 수가. 느긋하게 차 한 잔 마시며 뜰 안에 느티나무 그 그늘아래 서보니 가을임이 느껴진다. 하늘도 몰라보게 높아졌다. 하늘이 높아지는 것은 여름이 그치고 어쩌지 못하는 감정들이 침착하게 한 곳에 모이기 때문이라는 글귀를 읽은 적이 있다. 아마도 그 한 곳이란 사람의 마음일 거라는 생각을 해 본다. 어쩌면 내 속에서 꺼내 놓은 두근거림일 수도, 어쩌면 나무가 차려놓은 아름다움일 수도 있다. 그것이 뭐가 됐든 요즘 무언가에 몸을 흠씬 두들겨 맞은 사람처럼 온 몸이 뻐근하다.

같은 상황이라도 봄에 보는 것과 가을에 보는 것은 사뭇 다르다. 그것이 봄에 아련했다면, 가을엔 보고 싶다. 봄꽃에게서 뭔가를 수혈 받았다면, 가을엔 떨어지는 것들 앞에서 마음이 흐릿해져 뭔가 빠져 나가는 기분이 든다. 봄에 몽글몽글해졌던 것들이 가을에는 뭉클뭉클해지니 말이다. 떠오르는 이름들이 가을 햇살을 받아 대책 없이 눈이 부시다. 이처럼 세상 모든 소리가 심상찮게 들리면서 다시금 메아리치는 것은 가을이 하는 일이다. 문득 애틋한 엽서 한 장쯤 보내고 싶어진다.

새 터에서 모든 것이 낯설다.“낯설고 외롭고 서툰 길에서 사람으로 대우받는 것. 그래서 더 사람다워지는 것 그게 여행이라서”이병률 작가는 그렇게 말했다. 삶도 다를 바 없다. 오늘 나는 어떤 누구와 공연하는 날인가. 내 옆에 있는 사람들. 그들은 내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어떤 마음을 내게 안겨줄까. 나는 또 그들에게 어떤 이야기, 어떤 마음을 안겨줄 수 있을까. 다시는 오지 않을 시간에.

세상은 보기 나름이고 그 나름이 사람을 형성한다. 내가 지금 빠져 지내는 것. 그것이 지금의 나를 설명해 줄 것이다. 나는 지금 새 일터에서 새로이 만난 인연들. 그들이 한 공간에서 들려주는 숨소리, 이야기, 마음결, 뭐 그런 것들의 맛을 느끼는 재미로 이 가을을 시작하고 가을을 보내게 될 것 같다. 스스로 낮아지는 것. 주어진 걸 적절하게 취하고 나머지는 환원하는 것, 나를 위한 소비보다 남을 위한 나눔이 많아지는 것이 바로 멋지게 사는 일이라는 걸 기억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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