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서천교육지원청 교육과장 신경희

지난 삼월 학교에서 교육청으로 자리를 옮겼다. 학교장으로 있던 4년 동안 책임자의 자리는 늘 무겁고 부담이었다. 오랜만에 다시 근무하게 된 교육청 업무는 어설프기도 하고 챙겨야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래도 어깨는 한결 가볍다.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자리란 것이 얼마나 버겁고 어려웠었는지를 비로소 느끼며 산다.

총 책임을 지는 자리에서 중간 역할로 바뀌었음에도 여유 없이 동동거리며 살아온 것 같다. 올 들어 연수 한 번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다. 그래 지난 달 말. 부랴부랴 사이버 연수를 신청했다. 이미 시작됐는데 시간을 내기가 만만치 않다. 이러다간 과정을 마칠 수 나 있을지 걱정이다. 강좌명은 거창하다.‘유쾌 상쾌 통쾌 소통 훈련 프로젝트’다. 언제나 모든 소통이 시원스레 술술 풀려나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맘에서 특별히 고른 강좌다.

며칠 전, 어렵사리 짬을 내어 강의실에 들어가 보니‘생각해 봅시다’란 코너가 불쑥 튀어 나왔다. 새로운 차시로 바뀔 때마다 어김없이 나타났다.‘우리들이 모여 만들어진 이 세상이 많이 삭막해졌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더불어 사는 세상을 위해 나는 무엇을 해왔는지 돌이켜보면서 최근에 웃었던 일과 울었던 일에 대해 떠올려 봅시다’라는 사전질문과 함께 200자 내외로 정리하는 여백이 마련되어 있었다. 바쁘기도 하고 실은 귀찮아서 그냥 넘기려 하니 뭐라도 적지 않으면 다음 장으로 넘어가지질 않았다.

할 수 없이 몇 자 적노라니. 그동안 더불어 사는 세상을 위해 나는 무엇을 해왔는지 울고 웃었던 일, 그 무엇 하나 딱히 잡히는 게 없었다. 헛살았구나 하는 자책감이 들었다. 구태여 이런 코너가 아니었어도, 이 맘 때쯤이면 자연스레 한 해를 돌아보게 된다. 시간이 없다고 허둥대던 일, 숨이 막혀서 못살겠다고, 덥다고 춥다고 발 동동 구르던 시간들. 작고 소소한 일들이 얼마나 행복하고 즐겁게 해주었는지를 알아채지 못한 채, 커다란 행복이 어디 없나 두리번거린 시간들이 부끄럽기도 하고 허망하다.

교육청으로 부임한 얼마 후였다. 어느 행정실장님이 우편으로 시집 한 권을 보내줬다. 고은 시인의 <순간의 꽃>. 짧지만 강력한 울림이 있는 시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비로소’는 거기서 만난 시다.‘노를 젓다가 노를 놓쳐버렸다. 비로소 넓은 물을 들여다보았다.’단 한 줄이었지만 전율이 일던 그 강력한 힘이란. 삶이 기우뚱거리거나 여유 없이 허우적거릴 때마다 나는 그 시를 떠올리곤 했다. 그러면 해가 뜨면서 일순간 안개가 걷히듯 복잡하고 와글거리는 머릿속이 맑아졌다. 어떤 묘약보다 신통했다. 생각해보면 모든 일이 종이 한 장 아니던가. 노를 들고 있다가 놓치는 순간, 그래도 배는 물 위에 떠 있지 않던가. 노를 놓쳤으나 훨씬 튼튼하고 멋진 새 노를 갖추게 되는 전환점을 맞을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얼마 전 남도를 다녀왔다. 눈이 멀 것 같은 새파란 하늘을 이고 보리 암으로 가는 길은 시리고 눈부셨다. 고즈넉한 암자 마당에 이르는 동안 콩알만 한 빨간 열매가 달린 먼 나무를 만나기도 했다. 꽃보다 아름다운 열매를 달고 있던 이름 모를 나무. 계절을 건너온 그들을 다 기억할 수는 없었다. 내가 이름을 불러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나무들조차 그리움의 거리에 있었다.

어느새 세밑이다. 지나온 길이 아득하지만 크게 웃었던 일, 눈물 흘렸던 일, 갈등으로 답답하고 때론 절망에 처하던 때도 있었다. 그러한 나날 속에서 나는 늘 하늘을 보았다. 하늘엔 별이 있으니까. 별은 희망이고 그리움이다. 사람을 살아 있게 하는 힘이 있다. 여윈 겨울 햇살이 땅거미 속으로 사라졌다. 하늘을 본다. 비로소 깜빡깜빡 별이 돋는다. 세상만사 모든 일이 뜻대로야 되지 않는다는 것쯤이야 이제는 넉넉히 깨달았지만 그래도 삶은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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