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서천교육지원청 교육과장 신경희

누군가는 말했다. “지나고 보면 아름다웠다 싶은 것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여행이고 다른 하나는 청춘이다” 라고. 그런데 이 둘은 진행 중일 때는 그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잘 느끼지 못한다. 시간이 흘러서야 비로소 그리움이 깃든 추억이 된다.

개천절을 낀 황금연휴였다. 빡빡한 직장생활에서 잔잔한 여백을 즐길 수 있는 쉼표가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새해가 되면 어김없이 기대하는 일이기도 하다. 까만 숫자 사이를 비집고 나란히 서 있는 빨간 숫자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어깨가 가볍고 여유롭다. 설레고 기다려지는 일이다.

이번 연휴에도 어딘가로 떠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말간 가을날이 연속되었다. 덕분에 모든 일 밀쳐두고 무작정 코스모스 한들거리는 국도 따라 눈길 닿는 곳에 멈춰서 가을바람을 멀미나도록 마셨다. 공기 중에 있는 모든 축복이 몸속으로 들어와 세포 하나하나에까지 퍼지는 그 느낌을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

연휴 마지막 날은 그리움이 머문 곳. 상사화 붉은 파도 끝에 있는 불갑사로 향했다. 골골 억새 강이 흐르고 고개 숙인 황금빛 들판 따라 먼저 법성포에 들렀다. 가을 햇살 박힌 굴비들이 짭조름한 바람에 매달려 익어가고 있었다. 불갑사 가는 길은 정갈하고 예뻤다. 주변 일대가 불법을 전한 마라난타의 마음이 붉게 타올라 물들었음을 알리는 흔적만이 고즈넉이 남아 있었다. 그간의 업장을 사르고 붉은 꽃대를 올렸으리라. 못 견디게 생각이 떠나지 않는 그런 날이 있다. 바람이 지나다 만져주는 기억 저편으로 밀려드는 그리움이 가던 길을 멈춰 서게 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란 꽃말을 가진 상사화에 대한 전설은 여기저기 피어 있다.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다 다르지만 내용은 유사하다. 불갑사 상사화도 그렇다. 토굴 속에서 수도하던 스님과 불공을 드리러 온 처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잎은 꽃을 보지 못하고, 꽃은 잎을 보지 못하는 상사화. 잎이 죽어야 꽃을 피우니 잎과 꽃이 어찌 만날 수 있으랴. 이들의 못다 핀 그 사랑을 기억하며 상사화라 이름 하였다 전해 온다.

인도 간다라 출신 마라난타가 법성포로 들어와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불갑사는 불갑산 자락에 포근히 안겨 있었다. 번뇌와 흐트러진 마음이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일주문을 지나니 현존하는 목조 상으로는 국내에서 가장 크다는 사천왕상이 버티고 있어 든든했다. 맨 뒤에 자리한 대웅전 불당의 방향이 정면이 아닌 측면을 향해 있는 것이 다른 절과는 판이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규모는 작아졌지만 옹기종기 앉아 있는 건물 곳곳에는 불교를 이 땅에 전한 최초의 사찰이라는 자부심이 깃들어 있었다.

그리움이 머문 곳에 가슴으로 남는 느낌 하나 사뿐히 자리 잡는 빛 고운 가을날이었다. 가을 건너가는 소리, 낙엽 지는 소리 점점 선명해질 즈음 다시 오리라 귀띰 하고 돌아오는 길. 투명한 햇살을 받아 빛나는 나뭇잎과 그 아래에서 숨죽인 채 나뭇잎의 밝음을 받쳐 주는 그늘이 함께 있어 더 아름다운 불갑사의 그리움이 붉은 노을로 물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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