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서천교육지원청 교육과장 신경희

최근 모 일간지를 뒤적거리다가 ‘나를 흔든 시 한줄’ 이라는 타이틀에 눈길을 잡혔다. 배우 강부자를 흔든 시는 이기철의 ‘나무 같은 사람’이었다. ‘나무 같은 사람 만나면 나도 나무가 되어 그의 곁에 서고 싶다. 그가 푸른 이파리로 흔들리면 나도 그의 이파리에 잠시 맺는 이슬이 되고 싶다.’로 이어지는 시다. 감상 글은 짧았지만 강렬함으로 다가왔다. 세월과 생활 앞에 한동안 잊고 살다가 우연히 만난 이 시 앞에서 그녀는 눈이 번쩍 뜨였다고 한다.

몇 년 전부터 글줄이나 써 보겠다는 요량으로 시를 읽기 시작했다. 이젠 지나칠 수 없는 일과가 돼버린 지 오래다. 아무리 바빠도 단 한 줄의 시라도 만나야만 하루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마음이 통째로 휘어지는 시를 만날 기회가 적지 않다. ‘나무 같은 사람’도 그런 시 중의 하나였다. 그 누군가에게는 문학소녀의 꿈을 되살려 준 시였다고 들었다.

나무는 어디에고 많다. 그러나 나무 같은 사람을 만나기가 어디 쉬운가. 누구 말대로 미남이나 얼짱은 넘쳐나도 믿음직스럽고, 무엇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나무 같은 사람 찾기가 쉽지 않은 세상이다. 물론 섣부른 단정일 수 있다. 한번 뿌리내린 뒤로는 제 명을 다할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나무 같은 사람. 웬만한 고통엔 아프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는 우직함을 지닌 사람. 제 모습을 땅 속에 감추고 일하는 뿌리 같은 사람. 그런 사람 만나면 옆에 서고 싶고, 기대고 싶어진다.

아주 오래 전 얘기다. 어느 날 생각지도 못했던 나무가 내 관심 안으로 들어왔다. 이파리들을 있는 대로 팔랑거리면서 손짓하는 자태로 나를 불러 세웠다. 그 이파리들의 손짓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따뜻함이랄까. 뭐랄까. 가로로 세로로 그 맘을 말 대신 표현하는 것처럼 보였다. 바라본다는 것은 또 다른 관심과 사랑. 관심 안에 들어온 것은 누구에게나 그만의 세계가 되기 마련이다. 맘 약하고 눈물 많은 시골뜨기 그냥 그대로 맘 놓아버렸었다. 그 날 이후, 마을 어귀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눈길을 주고받으며 사계절 내내 흔들림 없는 동구나무처럼 내 삶을 지켜주는 그런 나무 한 그루 살고 있다.

그게 어느 해였던가. 동구나무 아래 묻어 둔 슬픈 묵언들이 수세미 속같이 얽혀 몸살을 하던 가을날. 붉게 노랗게 토해내는 나무의 고해성사 앞에 그리움의 열병을 앓았었다. 가슴뼈를 활짝 열어 줄기줄기 뜨거운 수액이 도는 따뜻한 나무. 가로와 세로로 짜 늘인 넓은 나무 그늘 아래 숱한 밤을 애면글면했다. 손 끝 하나 닿을 수 없는 마음만 마주 뜨고 지는 아득히 먼 하늘에 노란 시월이 붉은 시월이 파도처럼 몰려왔었다. 다 옛 이야기가 돼 버렸다.

가을비 한차례 다녀가더니 주변 모든 것들의 명암과 윤곽이 더욱 또렷해졌다. 가을바람으로 멀미가 나는 시월이 시작됐다. 시월엔 김동규의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 노랫말이 입안에서 맴돌곤 한다. ‘ 창 밖에 앉은 바람 한 점에도 사랑은 가득한 걸 널 만난 세상 더는 소원 없어 바램은 죄가 될 테니까 살아가는 이유 꿈을 꾸는 이유 모두가 너라는 걸’

파란 하늘만큼 깊어진 가슴 빈터에 오늘도 침묵을 심고 또 심는다. 혼자 있어도 햇살 노을이 찾아와 빛내주고 별빛 달빛이 함께 밤을 새워주는 나무 같은 사람. 보고 싶은 파란 하늘 올려다보면서 바람이 지나 간 자리마다 영혼이 모이는 나무 같은 사람.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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