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서천교육지원청 교육과장 신경희

9월 들어서며 총 총 총 바빴다. 짧은 인연이었다. 정들기 시작했던 사람들과의 마음 정리가 생각보다 쉽지만은 않았다. 덜컥 새 임지에서 익숙지 않은 삶에 뒤뚱거렸다. 함께 있을 때는 그 귀하고 좋은 줄을 모른다. 떠날 때야 비로소 아쉬움을 느끼게 된다. 사는 게 다 그렇다.

어느 책에서 보니까 달맞이꽃이 어스름 달빛에 찾아올 박각시나방 기다리며 봉오리 벙그는 데 17분. 꽃잎 활짝 피는 데 3분이 걸린다고 한다. 20분이 달맞이꽃에게는 한 생인 것이다. 그 무엇에겐 한 生이기도 한 그런 시간의 소중함을 느낀다. 그러니 6개월이라는 시간이 결코 짧은 인연만은 아니다. 사계절을 네 번이나 보낸 곳에서 떠날 때도 그렇지는 않았다. 그런데 짧은 인연 앞에 눈물이 났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준 선물 같은 짧고도 긴 시간이었다.

추석 대체휴무일 덕에 덤으로 얻은 시간이다. 오랜만에 고개 들어 하늘을 본다. 하늘이 투명하고 높아졌다. 아무리 봐도 싫증나지 않을 성 싶다. 늘 거기 있는 하늘, 그러나 늘 같지 않은 하늘. 그곳에서 금빛 햇살이 쏟아지고 있다. 목 뻣뻣하게 세웠던 벼 이삭들이 누렇게 고개를 숙여 가고 있다. 도처에 웅크리고 있던 음습하기 그지없던 습기들이 모두 증발됐다. 그 많던 하루살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홀연히 당도한 가을 앞에 새삼 궁금해졌다.

올 추석엔 슈퍼 문이 떴다. 솔솔 바람 불어 좋던 날. 긴 산 그림자 위로 창백하게 떠올랐던 그 초승달이다. 열사흘 시름시름 밤을 앓던 기다림을 올올이 풀어 내리어 환한 슈퍼 등을 켰다. 손에 잡힐 듯이 걸려있던 휘영청 크고 밝은 보름달. 산을 넘고 아파트 지붕을 넘어 아득한 도로 위로 따라오며 미소 지었다. 샛길로 한 십리 그렇게 무심히 달빛과 함께 걷고 싶었다.

문득 이해인 수녀님의‘보름달에게’싯귀가 떠올랐다.‘네 앞에 서면 늘 말문이 막힌다.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 차오르면 할 말을 잊는 것처럼 너무 빈틈없이 차올라 나를 압도하는 달이여. 바다 건너 네가 보내는 한 가닥의 빛만으로도 설레이누나. 내가 죽으면 너처럼 부드러운 침묵의 달로 사랑하는 이들의 가슴에 한 번씩 떠오르고 싶다.’

추석 지나고서야 비로소 마음의 여유를 찾아 해안도로를 한 바퀴 돌아봤다. 줄지어 선 배롱나무들. 한여름 내내 화사하게 달고 있던 귀고리들이 거의 떨어져 나가고 처연한 무늬만 남아 있었다. 더욱 파래진 바다는 매기 추억처럼 날아와 파도 한 줌 베어 물고 꿈처럼 흩어졌다. 언제부터인지 내 안의 주파수도 몰라보게 강렬해졌다. 이제 가을은 그렇게 그 사람의 눈동자처럼 깊어만 갈 것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엔가 목 놓아 의지하고 싶은 몸부림인지도 모른다. 때로는 놓아주고 보내주는 강 같은 것이다. 새 옷을 갈아입은 이 자리에서 때때로 누군가에게 희망을 촘촘 재생시켜 주기도 하고 구겨진 자존심도 반듯하게 세워 돌려주면서 그렇게 살고 싶다. 안으로 안으로 고개 숙이는 계절. 바람과 구름과 태양의 비밀을 잉태한 생명들이 우루루 탄생되는 이 가을엔 내가 네게로 흘러가고, 네가 내게로 흘러가듯이 말랑말랑하고 서로의 살을 뚫고 삼투하듯이 그렇게 흘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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