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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립 선생의 서글픈 사연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신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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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8.11  17:5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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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암당(寒闇當) 이유립(李裕岦, 1907-1986) 선생은 1907년 음력 11월 14일 평안북도 삭주(朔州)군 구곡면 안풍동 구경포 청계령산 아래에서 삭주지역의 유지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이관집(李觀楫)과 태인 백씨(태천진사 백관묵과 일가) 사이에 5남 3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철성이씨(鐵城李氏=固城李氏) 시조 이황(李滉)의 35세 손으로 태어났는데, 철성이씨 집안은《단군세기》저자 이암(李嵒),《태백일사》저자 이맥(李陌), 계연수(桂延壽)의 스승 이기(李沂), 상해임정 국무령 이상룡(李相龍) 등 대대로 훌륭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명문대가이다.

이유립 선생은 일평생 늘 고독과 세상의 질시와 가난을 적으로 하여 힘겨운 싸움을 해야 했다. 그렇지만 이유립 선생은 일평생 올곧은 선비정신을 잃지 않고 항일독립운동가로, 재야 민족사학가로, 정통국사 광복운동가로, 교육자로 활동하며 조국의 발전에 많이 기여했다. 그리고 이유립 선생은 자기 자신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면서도 별로 신경쓰지 않고, 동향의 오봉록(吳鳳祿, 1903-1981) 지사가 국가보훈처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 국립묘지에 안장되도록 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오봉록 지사 가족들은 물론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해주었다.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벌어지자 한암당 이유립 선생은 동년 4월 7일 신안동(新安洞)에서 태극기를 들고 조선독립만세운동에 가담하는 등 애국사상이 강했다. 그리고 남만주 관전현(寬甸縣) 홍석립자(紅石砬子)로 옮겨, 3년여를 머무르면서 단학회(檀學會)에서 주관하는 배달의숙에서『환단고기(桓檀古記)』를 편찬한 계연수(桂延壽)를 비롯해 독립운동가인 최시흥(崔時興)·오동진(吳東振)․신채호(申采浩)의 강연을 들었으며, 조선독립소년단의 단장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의민사(義民社)·천마산대(天摩山隊 : 西路軍政署 別營) 등 항일단체의 소년통신원으로 뽑혀 국내의 통신연락을 도왔다. 1923년에는 종정산(倧靜山) 아래 정곡(井谷)에 초막을 짓고 독서에 열중하면서 야학당을 설치하고 청소년들의 야간교육을 실시하였다.

1924년에는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삭주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입학해 1927년 21세에 6년제를 졸업하였다. 재학 중에도 천마산대 소년별동대격인 표면 삼육회(三育會)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어 김병선(金炳善)과 함께 매일 오후 방과후에 두 시간씩 역사와 상식을 강의하는 한편 윤번토론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매주 일요일과 휴학기간에는 근로작업과 학교림의 정기식수를 하는가 하면, 체육경기대회를 개최하고 <디딤돌>을 등사 발행했다. 그후 최석홍(崔錫弘), 김처원(金處元)과 함께 신간회 삭주지부를 발기하고 결성대회를 하다가 구룡포 왜경에 의해 해산을 당하자 만주로 건너가 한동안 머물렀다.

1930년에는 이기의 신교육종지를 실천할 목적으로 삼육사(三育社)를 조직해 위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농촌자력진흥, 청소년자유교양, 국제동향의 비판, 회람잡지 등을 발행하였다. 그러나 일제로부터 강제해산을 당하면서 한때 천마산에 입산하였다.

1933년에는 경기도 시흥에 안순환(安淳煥)이 세운 명교학원(明敎學院 : 일명 朝鮮儒學會)에 입회, 이상룡(李相龍)의『대동광의(大同廣義)』, 이기의 『유서』, 량치차오(梁啓超)의 『음빙실전집(飮氷室全集)』을 연구하였다. 한편, 대종교(大倧敎)의 남도본사와 시흥 녹동에 있는 단군교본부의 활동상황에 관심을 가지고 보다 더 강력한 민족적 이념을 탐색하였다. 그리고 조선유학회 기관지인 『일월시보(日月時報)』의 주필이 되기도 하였다.

1939년에는 이상유(李尙游)의 희사금으로 신풍학원(新豊學院)을 설립, 학감 겸 교사로 근무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의 신사참배 불응과 창씨개명 불응 등이 배일행위로 지적되어 폐교조치를 당하였다.

1945년 4월에는 건국동맹(建國同盟)의 평안북도 삭주책을 맡았다. 그런데 전봉천(全鳳天)의「대동아전쟁거부론」 삐라살포사건에 관련되어 구령포 일본헌병대의 문초를 받던 중 광복을 맞았다. 그 해 9월 압록강국민학교 교장과 풍민조합장(豊民組合長), 대한근로국민회 문화부장 직에 피임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그 해 10월 3일 천마산제전대회에서 독립운동가 이용담(李龍潭)의 주재로 결성된 단학회(檀學會)의 기관지 『태극(太極)』의 주간으로 피임되었다. 그러나 1946년 1월 신년호에 게재된「신탁통치반대론」이 문제가 되어 구금, 폐간되었다. 즉, 소련군 반출양곡 제지 등을 내세워 군중궐기대회를 책동했다는 청우당 정치부의 허위고발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삭수검찰소에 구금된 지 2개월 만에 무혐의로 출감되었다.

1948년 5월 월남 도중 해주에서 붙잡혔다가 4개월 만에 출감되었다. 그 해 추석 다음날 밤에 월남하였다. 1963년 5월, 단학회를 계승해 단단학회(檀檀學會)로 개칭한 뒤 조직을 확대하였다. 그리고 3대 회장이 되어 본부를 대전시 은행동 자택에 두고, 기관지 『커발한』을 53호까지 발행하여 전국의 대학교와 도서관, 회원들에게 배포했다. 1969년에는 단촌 이석영의 경제적 지원을 받아 강화도 마니산에 환인(桓因)·환웅(桓雄)·환검(桓儉) 등 국조 삼성을 받드는 개천각을 세우고 대영절(大迎節)과 개천절의 제천행사를 하였다.

1976년에 의정부로 거주지를 옮겨 단촌 이석영의 경제적 지원을 받아『광개토성릉비문역주(廣開土聖陵碑文譯註』·『세계문명동원론(世界文明同源論)』을 치례로 펴내고, 1976년에는『커발한문화사상사』 I·II를 발간하였다. 또한, 그 해 10월 박창암(朴蒼巖)·안호상(安浩相)·문정창(文定昌)·임승국(林承國) 등과 함께 국사찾기협의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잡지『자유(自由)』에 글을 기고했으며, 1983년에는 단촌 이석영의 경제적 지원을 받아『한암당이유립사학총서』를 간행하였다. 1987년에는 이유립 선생이 일평생 배달 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조사연구해 발표한 논저를 집대성한『대배달민족사』 5권이 간행되었다.

아무튼 이유립 선생은 한말인 1907년에 태어나 항일독립운동을 하고 9천년 한민족사를 연구하다가 1979년에『환단고기』를 처음으로 공개해 역사학계를 놀라게 했고, ‘정통국사광복운동’을 주도한 재야 사학계의 대표적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대학 강단은 물론 학술원과 예술원까지 장악한 강단사학자들의 위세에 눌려 별로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다행히도 이유립 선생은 전국 각지에 양종현, 박정학, 전영배 등 5,000여명의 제자를 두고 있다. 그리고 그의 유지를 받들어 대배달민족사를 조사연구하고 있는 한배달과 그의 업적을 추모하기 위해 조직된 한암당기념사업회가 있다. 또한 부인 신유경씨(93세)와 1남 5녀의 자녀들이 생존하고 있다.

그런데 이유립 선생은 아직까지 국가보훈처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해 국립묘지에 그의 유골이 안장되지 못하고 있고, 유가족들은 경제적으로 어렵게 살고 있다.

그러니 국가보훈처가 하루라도 빨리 이유립 선생 유족들을 찾아 뵙고 이유립 선생의 독립운동 공적을 조사하여 이유립 선생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고 전향적으로 보상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한편, 이유립 선생의 유해를 국립묘지에 안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근 대전민족문제연구소 이규봉 지부장은 "마지막 임정요인이었던 조경환 선생은 임종을 눈앞에 두고 '친일파가 묻혀있는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에는 절대 가지 않겠다'는 유언을 남겼다"며 "국립묘지법을 개정해 반민족행위자들과 반국가 사범들을 모두 파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2014년에 3.1절 95주년을 맞이하고서도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 11월 8일에 발간한『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되어 있는 김창룡·김은순·이응준·이종욱·엄민영·조진만·서춘·박영희 등 친일민족반역자들의 시신 수십 구가 아직도 국립 현충원에 안장되어 있어, 시민단체의 항의시위가 끊이질 않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국가보훈처는 친일민족반역자들의 시신을 강제로 이장할 수 있는 법안을 조속히 마련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소중한 목숨을 바치고서도 아직까지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지 못해 억울해 하는 독립유공자 가족들의 피맺힌 한을 하루라도 빨리 풀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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