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서천 서면중학교 교장 신경희

계절이 깊어갈수록 햇빛이 다르고 물빛이 다르고 바람이 다르다. 몇일 전 소리 없이 다녀간 가을비 덕분일까. 한층 선명해진 풍경이 황홀하기 그지없다. 요즘 그 향연을 누리기엔 출퇴근길이 너무 짧아 맥없이 해안도로나 금강 변으로 돌아가기 일쑤이다. 가을이면 앓는 병이다. 가을에는 꼭 그렇다. 수년 전 대전으로 출퇴근하던 시절엔 너무나 힘들어서 경치고 뭐고 한참을 가다가 운전대를 놓아버리고 싶기도 했었다. 그런데 가을 눈요기 좀 더 하겠다는 욕심으로 이리저리 돌고 돌아가는 내 모습이 철딱서니 없기도 하다. 그러나 좋은 것은 언제나 오래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무엇보다 그 느낌 아니까 있을 때 더 붙들고 싶어지는 게다. 매일매일 가슴이 울렁거릴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축복인가.



‘느낌 아니까’라는 표현을 하고 보니 모 방송 개그 프로그램에서 어느 여자 개그맨이 “이거 제가 할께요, 느낌 아니까~”로 대중의 시선을 붙들어 두고 있는 유행어 같아 머쓱하다. 퇴임한 모 대통령은 “내가 해 봐서 아는데~”라는 말을 유행시킨 적도 있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시간이 허락되는 한 발길 돌려 가을을 원 없이 마시라고 권하고 싶다. 그 느낌이 너무나 좋다. 그러나 누릴 수 있는 시간은 짧기 때문이다. 은행잎과 플라타너스 잎으로 찬란한 가로수 길, 야산 곳곳에서 타오르는 옷 나무 잎들의 붉은 몸짓, 하늘로 날아오르는 가창 오리떼 모습, 석양빛으로 흐르는 금강, 갈대의 서걱거림은 불안한 영혼을 지그시 눌러주는 음악과도 같다. 그 느낌 아니까, 가을엔 도저히 그저 지나칠 수만은 없는 것이다.



빛 좋은 어느 날 오후에 전 직원이 무량사에 다녀왔다. 가장 좋은 때 찾아간 것 같았다. 조금만 때를 놓쳐도 그러한 절정을 만나기 어려웠을 텐데. 어찌나 황홀경이던지 참 잘 왔다 싶었다. 노루꽁지만한 가을햇살을 받은 은행잎, 단풍잎들이 반짝반짝 오묘하게 빛나던 모습. 등산길에 만난 애기단풍들의 열렬하던 그 몸짓. 요즘 들어 이상하게 어지럼증이 수시로 일어나 걱정하던 차였다. 불안하던 마음이 치유되고 잠든 감성들이 올올이 깨어났다. 산에 오르니 기분도 한층 맑아졌다. 자연과 하나 되는 힐링의 시간이었다. 덕분으로 행복한 마음이 그들먹해졌다.






바쁜 일을 마치고, 향 좋은 차 한 잔 마시며 폐이스북 화면을 열었다. 대뜸 곱게 물든 플라타너스 가로수길 사진이 차올랐다. 나무 사이에 놓인 벤치 속으로 나도 모르게 마시던 찻잔을 들고 걸어 들어갔다. 버버리 코트 깃을 세우고 앉아 온전히 홀로인 고독이 호수에 던져진 잉크병처럼 몸 전체로 번졌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눈을 뜨고 바라보니 사무실 가득 가을햇살이 우루루 달려든다. 세상을 바라보는 창은 자신이 서 있는 위치와 마음에 따라 각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이 다르다는 것을 실감한다. ‘만추의 계절 서둘러 걷지 마십시오. 머리가 가는 속도를 가슴이 따라올 수 있도록 조금 천천히 가십시오. 그리고 그 바로 뒤를 따르는 행복도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느리게 걷는다는 것은 게으른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이 보지 못했던 세계에 대한 눈뜸입니다.’ 라는 좋은 글귀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매년 이맘 때 쯤이면 생각나는 수필이 있다. 짧은 산문으로 사람들을 감동시켰던 독일 작가 안톤 슈낙(Anton Schinack)의 ‘우리들을 슬프게 하는 것들’이다. 그는 서정 짙은 수필에서 ‘시냇물의 쫄쫄대는 소리, 곁방 문이 열리고 속살거리는 음성이 들리며 낡아빠진 헌 시계가 새벽 한 시를 둔탁하게 칠 때, 그 때 당신은 난데없는 애수를 느낄 것이다. 울음 우는 아이들, 가난한 노파의 눈물, 추수 후의 텅 빈 밭,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 고 했다. 교정의 은행잎이 노란색으로 물들어가던 어느 날, 이지적인 눈매를 지닌 국어선생님이 애조 띤 음성으로 읽어 주시며 우리를 감동케 했었다. 그날의 모습이 기억 저편에서 환하게 되살아난다. 글이란 아는 만큼 보이고 겪은 만큼 느낀다고 했던가? 같은 글을 이쯤에서 읽어보니 지나온 삶에서 안톤 슈낙이 열거한 ‘슬프게 하는 것들, 이 여기저기서 묻어져 나온다.



우리를 둘러싼 우주의 한 작은 비밀이 벗겨지듯이 환한 세상이 열리고 변화해가는 시간의 흐름이 너무나 찬란했다. 이제 가을바람에 나뭇잎들이 하나 둘 수런수런 옷을 벗는다. 계절 순환의 고리를 따라가는 것이다. 내 가슴 어디선가도 낙엽 한 장 툭하고 떨어진다. 얼얼한 가슴, 마음이 헛헛하다. 가을은 가도 추억은 남아 우리를 따뜻하게 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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