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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응/원/단/장 박 용 식 씨


국내외를 막론하고 축구 국가대표팀 경기가 있을때면 항상 이슈가 되는 인물, 환호와 탄성 그리고 기쁨과 감동의 응원현장을 지키는 작은거인, 태극조끼와 태극문양을 한 얼굴이 이젠 트레이드 마크가 돼버린 12번째 태극전사. 그 주인공은 바로 아리랑응원단장인 박용식씨(49·서구 만년동 황포갈비 대표)이다.
축구를 너무 사랑하다 보니 축구에 미친 사나이라는 수식어 외에 ‘꽹과리 아저씨’, ‘태극조끼 아저씨’, ‘태극마크 아저씨’ 등 그에게 붙여진 별명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다.
우리 축구사에 경이적인 기록을 남겼고 전 세계가 놀랐던 지난 2002년 월드컵때 그라운드에 히딩크가 있었다면 그라운드 밖에는 박용식씨로 압축될 정도로 그는 축구 마니아다. 그의 지명도는 이제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알아줄 정도로 유명인이 돼 버린지 오래. 그가 가는 곳은 언제난 전 국민의 함성과 열광이 용솟음 쳤으며 영광과 감동이 함께했다.
자그마한 체구지만 축구경기가 있는 곳에선 말 그대로 ‘헐크’가 돼버리는 그다. 그에게는 축구에 미친것 외에 또 하나 미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20여년간 계속돼 온 불우이웃에 대한 봉사활동이다. 신이 인간에게 하루 24시간을 주었지만 그의 사회활동을 찬찬히 들여다 보면 마치 24시간 외에 1시간을 더 준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다. 따스한 봄날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으려니까 불연듯 그가 보고 싶어졌다.
대전이 낳은 월드컵 전사인 그를 만나 2010년 남아공월드컵 이후의 근황과 그동안 타 언론에는 꺼내놓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들어본다. <편집자 주>




해외 경기전 애국가 부를때 감정 못잊어 매번 응원


히딩크와 한짝씩 가진 황금축구화는 재산목록 1호




-아리랑 응원단의 탄생 동기는.
“1994년 가수 김흥국씨와 연예인 10명이 조선일보에 1994년 미국월드컵에 가서 응원할 전국응원단원 200명을 공개모집했는데 그때 제가 거기에 참여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됐다. 그 당시에는 아리랑 응원단이 아니라 한국월드컵 응원단이였다. 미국월드컵을 갔다 오고 나서 현재의 이름인 아리랑 응원단(단장 김흥국, 응원부장 박용식)이 결성됐고 김흥국씨와 의형제도 그때 맺었다.”
-국가대표 해외 원정경기 응원은 언제가 처음인지.
“국가대표 응원은 1994년 미국월드컵때가 처음이였다. 이후 A매치는 빠짐없이 거의 다 다녔으며, 올림픽주경기장서 국내응원도 밥먹듯이 했다. 그 당시는 붉은악마가 없던 까마득한 시대였다. 그러니까 아리랑 응원단이 붉은악마의 원조라고 할 수 있겠다.”
-남아공월드컵행을 포기한 이유는.
“남아공 가기 일년전에 맨체스터팀과 서울FC가 상암월드컵경기장서 경기가 있었다. 제가 후원해 온 성우보육원(원장 김익자·대전시 대덕구 연축동 소재) 원생 20명을 데리고가 경기를 본후 돌아오는 차안에서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를 가졌다. 기자가 ‘남아공에도 아이들을 데려갈 수 있겠냐’는 질문에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많이는 데려갈 수 없지만 최소한 1~2명은 해보겠다’ 했으며 그 약속을 지킨 것 뿐이다. 원래는 저하고 원생 1명을 데려갈려고 했는데 보육원에서 선발된 또다른 1명이 울고 불며 가겠다고 떼를 써서 나 자신을 포기하고 아이들을 보내는 것이 옳다고 최종 판단해 애들만 보내게 됐다. 그 당시 저까지 가게 되면 경제적 부담이 너무 커서 어쩔수 없이 남아공행을 포기했다. 대신 애들에게 나라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 응원해 달라고 부탁했다. 다행이 아이들이 열심히 응원해 준 덕분인지는 몰라도 우리나라가 16강에 들어 너무나 기뻤다.”
-20여년동안 사회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동기가 있는지.
“어렸을때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가정형편상 그 짊을 떠맡아 동생들 뒷바라지를 하다보니 많은 고생을 했다. 어렵데 자라본 사람이 어려운 심정을 안다고 청소년기부터 어른이 되면 꼭 공부를 하고 싶어도 못하는 어린이들을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부자가 된 뒤부터 하는 것은 너무 늦다 싶어 결혼과 동시에 그동안 지나다니면서 봐왔던 성우보육원을 찾게 됐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곳 아이들 2명을 맡아 후원을 하게된 것이 봉사활동의 시작이다. 후원한 아이들 중에는 현직 판사와 교사 등 사회의 한 일원으로서 각자 맡은바 역할을 다하고 있어 흐뭇하다. 그것이 곧 내가 봉사활동하면서 되돌려 받는 기쁨인 것 같다. ”
-김흥국씨와 많은 응원을 같이 했는데 알려지지 않은 에피소드는 있는지.
“2010년 남아공월드컵 당시 흥국이형이 ‘한국이 16강에 들면 콧수염을 깎고 8강선 머리, 4강에 들면 온몸에 난 털들은 모두 깎겠다’고 선언했었다. 16강에 들어서 콧수염을 깎은채로 비를 맞으며 서울서 우루과이전을 응원한 추억이 떠오른다. 이날 아들 번칠이도 같이 응원을 했는데 기자들이 ‘아버지가 콧수염을 깎으니까 어떤 것 같냐’고 묻자 ‘우리 아빠가 아닌것 같다. 다시 콧수염을 붙였으면 좋겠다’고 말해 웃음바다가 됐던 기억이 난다.”
-대외적인 많은 활동으로 가족과의 갈등도 있을 것 같은데.
“축구를 통해서 오랜세월 너무나 많은 돈을 까먹었고 미친듯이 응원하니까 가족이 축구는 다 싫어한다. 그러나 봉사활동하는 것에는 모두가 대환영이다. 아빠와 남편이 오랜세월 봉사활동하는 것에 대해 기쁘게 생각할 뿐만 아니라 적극 지원해 주고 있으며,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아이는 중학교때부터 아빠를 본받고 싶다고 한달에 한번씩 보육원에 가서 봉사를 하고 있다. 이런 아내와 아이들이 너무나 고맙다. 정말 사랑하는 내 가족이다.
-태극조끼와 얼굴에 태극문양을 한 동기는.
“해외응원을 많이 하다 보니까 외신이 취재를 할때 어떻게 하면 한국을 많이 알리는 방법이 없을까 하는 생각에 태극기를 가지고 옷을 만들어 입고 얼굴에 태극페인트를 칠하게 됐다. 그 덕분에 많은 해외언론에 스포트라이트도 받았고 국민들에게도 ‘태극기 아저씨’ ‘쾡과리 아저씨’라는 별명을 얻게 됐다.”
-특별한 추억이 있다면.
“2002년 월드컵 당시 16강과 4강에 올라가자 청와대서 격려차원 축구관계자들과 함께 초청을 해 갔다왔다. 제가 워낙 얼굴에 태극페인트를 하고 다녀서 혹시 제 얼굴을 못알아 보실까봐 정장을 하지 않고 응원하던 그모습 그대로 하고 들어갔다. 김 대통령 내외분께서 그런 저를 바로 알아 보시고 ‘고생을 너무 많이 했다’면서 기쁘게 맞아 주시며 두손을 꼭잡아 주셨던 감회가 떠오른다.”
-해외응원을 40여차례나 갔다오게된 가장 큰 동기는.
“이역 타국만리서 경기전 애국가가 울려퍼질때 가슴에 손을 얹고 애국가를 따라 부를때의 찡한 감동과 전율을 잊을 수가 없다. 그 기억이 잊혀지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습관적으로 해외응원을 나가게 만들었다. 제가 생각해도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일반 국민들과는 남다른것 같다. 또 다른 하나는 우리나라가 있어야 태극전사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더더욱 월드컵과 올림픽때 더 열심히 응원을 하는 것이다. IMF때인 프랑스월드컵에 가서 느낀 감정인데 나라가 부도가나 신용도가 떨어지자 그나라 사람들이 대하는 태도가 사뭇 다르더라. 그래서 나라가 부강해야만 되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던 대회가 프랑스월드컵 대회다. 역시 나라는 잘살고 봐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베이징올림픽 남북응원을 하면서 느꼈던 감정은.
“응원단장인 저를 포함해 여야 국회의원, 사회지도층 등 400명이 남북응원을 했다. 그동안 대표팀만 응원했지 남북응원단장을 맡아서 응원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가장 기억에 남고 가슴이 아팠던 대회이다. 왜 우린 한민족인데 두개의 나라를 응원해야 하는지 혼돈이 왔다. 북한을 응원할땐 북한선수를 배려해 얼굴에 태극문양을 하지 않았다. 대신 따로 맞춰간 한반도기를 입고 응원했다. 이렇게 하면서 다시한번 느낀 것은 어서빨리 통일이 돼야 되겠다는 것이다. 베이징올림픽은 가슴이 아프고 보람도 있었고 내인생에 있어서 크게 각인된 대회였다.”
-남아공월드컵 이후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지금은 생활전선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 오로지 일에 파묻혀 바쁘게 살아가는 모습을 가족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그러나 사실 가족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머릿속에는 벌써 런던올림픽하고 브라질 월드컵에 가 있다. 말은 안하고 있지만 그때까지 열심히 일을 해야만 가족들이 허락해 줄 것 같아 최선을 다해 일에만 매달리고 있다.”
-가게 입구에 황금축구화가 전시돼 있는데.
“2002년 월드컵때 신발용품업체인 엔젤슈즈가 대표팀 수장인 히딩크 감독님과 응원단장인 저에게 각각 한짝씩 기증한 것으로 전세계에 한켤레 밖에 없는 황금신발이다. 재산목록 1호로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월드컵에 대한 개인적인 철학이 있다면.
“2002년 월드컵때 우리국민은 멍석을 깔아주면 신명나게 놀줄아는 국민이다는 것을 전세계가 봤다. 월드컵 기간동안 국민들은 즐거움과 행복감을 느꼈고, 축구공 하나로 전세계가 하나가 됐다. 유럽이나 남미 등 축구를 사랑하는 전 세계인들을 보면 축구 하나 때문에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 등 축구가 어떤 종목보다 묘한 마력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블랙홀에 빠져드는 것처럼 전세계를 하나로 만들수 있는 경기는 오직 축구밖에 없는것 같다. 축구는 교도소에서도 하지 않느냐.”
-마지막으로 꿈이 있다면.
“자랑은 아니지만 제가 외국언론에 자주 노출되다 보니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유명하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긴다면 잉글랜드로 해서 프랑스 AS모나코, 독일 함브루크SV와 분데스리가 VFL 볼프스부르크 등 한국선수들이 뛰고 있는 소속팀 응원단에 들어가 그팀을 응원해 보는 것이다.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태극전사들을 돌아보며 격려해 주고 응원해 주고 싶은 것이 내마지막 꿈이다. 응원을 할때 내 트레이드 마크가 워낙 독특하니까 각 외신방송들이 나를 찍게 될 것이며 그것이 이슈가 돼 우리나라를 알리는데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대담=송현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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